복잡한 일도 표로 만들어 보면 일목요연할 때가 있다. 몇권의 역사책보다 요령있게 정리된 연표가 역사의 흐름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그래서 우리 국회사를 표로 만들어봤다. 대단한 작업은 아니고 역대 국회의 임기가 시작된 날과 끝난 날을 좌·우 두줄로 적은 것 뿐이다. 표같지도 않은 표지만,거기 나란히 적은 날짜들이 잊어 버렸던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우선은 제헌국회로부터 제4대 국회까지의 임기 개시일이 가지런히 5월31일인 것이 눈에 띈다. 적어도 이 기간동안 헌정중단은 없었더라는 뜻이다. 그 다음 제5,6대 국회의 임기 개시일은 각각 7월29일(60년)과 12월17일(63년)이다. 4·19와 5·16의 상처들이다.
이 뒤로는 국회의 임기 개시일에 불길한 규칙성이 보인다. 제7,8대의 임기 개시일은 나란히 7월1일(67년과 71년)이다. 제9.10대는 나란히 3월12일(73년과 70년),제11,12대 역시 나란히 4월11일(81년과 85년). 이 「2대 나란히」의 규칙성은 그만한 간격을 두고 헌정중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뒤 끝에 13대 국회의 임기개시 5월30일(88년)과 14대 국회 임기 개시일이 나란히 섰다. 바로 오늘의 일이다. 바라기는 5월30일의 국회 임기 개시일이 앞으로 내내 고정되는 것이다. 오늘 14대 금배지를 다는 사람들의 감회는 어떨까.
앞의 「표 같지 않은 표」에 역대 국회의원 선거일과 국회 개원일을 더하면 총선이 있고,국회의 임기가 시작된뒤 얼마만에 첫 국회가 열렸는지를 한눈에 비교해 볼수가 있다. 그 결과 국회사의 또다른 일면이 드러난다.
세밀하기 그지없는 우리 정치관계 법에 이르기를,국회의원 선거는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되기 1백50일∼20일전에 시행한다(국회의원 선거법 제99조)했고,그 선거가 있은 뒤의 첫 국회는 「국회의원 임기 개시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집회」하며(국회법 제5조②),이 첫 집회는 국회 사무총장이 국회의장을 대신해 소집한다(동제14조)고 했다. 그러니 총선이 있은 얼마 뒤 국회가 개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그 날짜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국회사의 약식 연표는 사정이 꼭 그와 같지 않음을 말해 준다. 총선으로부터 국회의원의 임기개시일,임기 개시일로부터 국회 개원까지가 들쭉 날쭉한 것이다.
이중 총선 날짜를 보면,제10대 총선은 임기 개시일(3월12일=79년)을 앞두기 4개월인 그 전해 12월12일에 있었다. 임기개시 2개월여 전에 시행한 이번 3·24 조기총선은 저리 가라고 해야 할 기록이다. 법대로 하면,총선으로부터 국회개원까지는 최장 1백80일(임기전 1백50일+임기개시후 30일)의 간격을 둘 수가 있겠으나,총선개원 사이가 불안한 정쟁기,사실상의 국회 공백기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10대 국회 전야가 바로 그랬고,13대 국회가 5개월 공백 끝에 임기를 마치고,14대 국회가 언제 열릴지 모를 오늘의 형편도 그러하다.
왜 이런 불안정한 공백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다음 국회의 임기 개시일과 국회개원 사이도 둘쭉날쭉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들쭉날쭉이 지나쳐 제12대 국회는 임기 개시일(4월11일=85년)로부터 32일이 지난 5월13일에야 개원,국회법의 법정 시한마저 지키지를 못했다. 7대국회 때는 임기개시(7월1일=67년) 열흘만에,여당만으로 「반쪽 개원」한 기록도 남아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역대 국회가 종종 순탄치 못한 「개원전 절차」를 거쳐 왔음을 말해 준다. 첫 국회를 열기 위해서는,총선말고도 개원협상이란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는 얘기인데,그것이 소수 야당으로서 다수 여당의 일방적 국회운영을 견제하기 위한 기선잡기의 구실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 전통에 충실하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오늘 임기가 시작되는 14대 국회도 그 통과의례를 단단히 치러야 할 모양이다. 협상해야 할 안건도,국회의 감투나누기는 어떻게든 타협이 가능하겠으나,지자단체장 선거일정은 아무래도 합의를 도출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더욱 여·야가 이번 개원협상을 대선의 전초전으로,단체장 선거에 대선의 향방이 달린 것으로 생각하는 한,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14대 개원의 법정시한(6월29일)과 지방자치법이 못박은 단체장 선거시한(6월30일 이전)을 그냥 넘기면 어찌 될까. 그러다가,여당은 단독 개원을 감행하고,야당은 등원을 거부해서,절름발이(레임덕) 대통령과 절름발이 국회가 쌍벽을 이룬다면,그 때의 나라 꼴은 또 어떨까. 개원도 못하고,그래서 취임선서도 못한 주제에,국회의원들이 꼬박 꼬박 한달 4백26만4천4백20원의 세비나 챙긴다면,「무노동·무임금」이라는 표방이 울지 않을까. 그렇잖아도 5개월이나 놀고 먹은 13대 국회를 아니꼬와 했던 유권자들이,이 꼴을 참고 보기만 할까.
생각할수록 답답하지만,쳐다볼 데는 달리 없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에 도가 텄다는 두 사람이 여·야 전면에 나섰으니,그들의 정치 경륜이 어떤 것일지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의 한사람으로서 감히 일러 둘 말은 있다. 우선 국회는 개원해놓고 협상을 하라는 것이다. 그 협상이 난장판처럼 된다고 해도,국회 안 싸움이 국회 밖 싸움보다는 낫고,그래야만 「세비 도둑놈」이란 손가락질이나마 면할 수가 있다.
그리고,덧붙이자면,이번 개원협상에서는 앞으로 개원협상이 다시 없게 하는 방안도 협상해야하리란 것이다. 그 방안이란 별게 아니다. 국회의 첫 개원일을,총선뒤 며칠째,또는 총선 다음주 무슨 요일이라는 투로 국회법에 못박아 버리는 것이다. 그 보기는 미국 헌법의 조정 제20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33년에 발효한 이 규정에 따라 미국 의회는 1월3일 정오에 개원하며,이 시각에 국회의원 임기가 교대된다.
이쯤의 방안이면 우리 정치판에서도 협상이 가능할 것 같은데,어떨까.<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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