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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왜 「부시」를 노리는가(U.S.News 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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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왜 「부시」를 노리는가(U.S.News 본사특약)

입력
1992.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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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월남전처리 “배신감”/“대선출마 진실 밝히겠다”미국의 정치판에 회오리를 몰고온 텍사스 억만장자 로스 페로는 워싱턴의 실력자들이 동남아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 싸우다 행방불명된 미군장병들을 배반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며 「배신자」들이 장악한 현 행정부에 대한 환멸때문에 대통령출마를 결심하게 됐다고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월드 리포트」지가 최근호를 통해 보도했다. 유에스지의 보도에 따르면 페로가 마음에 새겨둔 배신자들중 최고의 정치인은 현재 백악관의 주인으로 미국의 정치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조지 부시 대통령이다.

페로의 출마결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부시의 「배신행위」를 알아보려면 우선 1950년대 말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페로의 주장에 의하면 월남전 당시 라오스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던 미 중앙정보국(CIA) 공작원들은 「라오스 황실군」 및 라오스 북부 산악지역을 장악한 몽부족과 긴밀한 삼각 연대관계를 맺었다. 몽부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골든 트라이 앵글」로 알려진 거대한 양귀비 재배지로 세계 최대의 아편생산지였으며 1971년부터는 미국 최대의 헤로인 공급지로 등장했다. 아편의 반입이 늘어나 미국인 헤로인 중독자들의 수가 격증하면서 아편의 수요와 가격은 급상승했고 CIA의 비호속에 마약밀매에 관여한 라오스 황실군과 몽부족은 엄청난 수입을 잡게 됐다.

페로는 CIA가 마약밀매의 뒤를 보아주는 대가로 이 두 단체가 거두어들이는 마약대금중 일부를 수중에 넣었으며 이를 해외 비밀공작 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믿고 있다.

1975년 4월30일 라오스에서 전쟁이 끝난후에도 CIA가 계속 이 지역의 마약거래에 관여했다고 믿는 그는 라오스와 월남에서 행방불명된 미군들의 생사확인 및 포로송환 작업에 미 행정부가 미온적이었던 이유가 CIA의 마약거래 사실과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단정했다.

바로 이 시기에 조지 부시가 등장하게 된다.

월남전이 끝난 직후인 1976년 CIA 국장으로 취임한 부시는 전쟁포로와 실종 미군문제를 중아정보국 통제하에 두었으나 열의를 갖고 문제해결에 임하지 않았으며 부시가 CIA 국장직을 물러남과 동시에 실종자문제의 관할권은 국방부 정보국으로 이전됐다. 페로는 부시가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CIA의 마약거래 사실이 행여 밝혀질까 두려워 미군 실종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추적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지만 이를 증명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에 본부를 둔 「누건­핸드」 은행이 파산하고 은행을 공동으로 소유한 2명의 파트너가 의문의 죽음과 실종을 하면서 CIA가 마약거래를 한 것도,또 이 때문에 미군 실종자 문제가 묻혀버린 것도 사실이라는 페로의 확신은 다져졌다. 의문의 사망을 한 프렌시스 존 누건에 뒤이어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마이클 존 핸드는 미 특전대 그린베레 출신으로 CIA에 의해 고용돼 동남아에서 비밀리에 활약했던 인물.

누건­핸드 은행의 파산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물론 홍콩과 필리핀 등 국외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은행이 동남아의 국제 마약밀매 조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고 봉급자 명단에 퇴역 미군장교들과 정보국원들의 이름이 대량으로 발견됐기 때문에 끈질기게 떠돌던 CIA의 마약거래설은 더욱 증폭됐다.

페로는 월남전이 끝난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지속됐던 미 정보기관들의 마약거래 공작을 총괄했던 인물이 전 국방차관이며 현 미 합참의장 콜린 파월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리처드 아미티지인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아미티지는 현재 구 소련연방에 대한 미국측 지원계획을 일선에서 지휘하고 있다.

일찌감치 아미티지를 배신자로 점찍은 페로는 암암리에 그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아미티지와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거의 발가벗은 여인의 사진을 입수했다. 그러나 사진속의 아미티지의 모습은 직접 나타나 있지 않았다.

페로는 몇년후 아미티지가 국방부 장관의 물망에 오르자 이 사진을 증거물로 내세워 그가 국방부의 총수로 임명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다.

결국 아미티지는 건강상의 이유 및 가족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이유를 밝히면서 국방장관 지명을 사양했지만 이것이 페로가 벌인 집요한 공작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페로는 1987년 레이건 행정부와 의회내의 자기 세력을 규합해 전쟁포로와 실종자문제를 다룰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성공했으며 자신이 그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제시된 모든 제안은 묵살됐고 베트남에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가고 싶다는 그의 희망도 좌절됐다.

백악관이 페로의 희망을 무시하고 존 베시 전 합참의장을 월남에 보낼 특사로 임명하자 화가 치민 페로는 단독으로 월남행을 강행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한채 귀국해야 했다. 페로가 대통령 특사자격을 따기위해 백악관을 들락거릴 당시 부통령이었던 부시는 특사자격 부여는 불가능하지만 그 대신 실종자에 관한 국방부 비밀문서 일부를 열람할 수 있도록 조처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페로는 이를 거절했다. 이때 페로는 부시가 지신의 월남전 실종자확인 노력을 방해하는 장본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고 둘을 이때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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