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19일 드디어 서울 전당대회에서 민자당의 대통령후보로서 선출됐다. 김 후보는 오늘의 지명을 얻기까지 얼마나 굴곡 심한 정치드라마를 연출했고 또한 당했던가. 그러나 그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끝이기는 커녕 이제 클라이맥스에의 등반이 시작된다. 그가 일생을 걸었다는 대통령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김 후보의 지명이 경합자였던 이종찬후보와의 「경선다운 경선」 끝에 얻어진 것이라면,민자당이 「민주주의 축제」속에 당의 결속을 과시했다면 김 후보의 정상에의 도전은 그만큼 쉬워졌을 것이다. 그는 이종찬후보의 경선거부가 가져온 당의 균열을 봉합하는 것에서부터 대선행보의 출발을 해야할 것 같다. 김 후보의 위상이 이제는 달라진다. 힘이 증폭될 것이다. 사람과 돈도 따를 것이다. 이미 줄설 사람은 다 줄을 섰다. 권세가 커지는데 따라 책임도 커진다. 김 후보는 파란의 한국 현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전환기마다 그는 「현장의 인」이었다. 그에대한 소개가 새삼스럽다 하겠다. 그러나 여당인 민자당 대통령후보로서의 『김영삼』은 이제부터다. 유권자들은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때까지 김 후보의 대통령 재목여부를 재어볼 것이다.
김 후보는 지금까지 「대중정치」나 「밀실정치」에서 정략가로서 본능적인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3,5공을 상대로한 민주화의 장점 김대중씨(민주당 공동대표위원)와의 결별,3당 통합,민자당의 지명획득 등. 이번의 파열 「경선」 과정에서도 좌고우면의 우유부단한 노태우대통령의 확고한 지지를 받아내는데 성공,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막판뒤집기의 명수」라는 평판은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로서는 국민들에게 뚜렷한 이미지를 부각시키지 못했다. 경선이 좋은 기회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흘려보냈다. 그는 이종찬 「경선」 후보자가 요구했던 공동토론의 장을 기피했다. 왜 기피했는지 잘 이해가 안간다.
김 후보가 경선파국 이전 신문편집인협회 조찬회,관훈토론회 등에서 밝힌 그의 대통령 정치의 청사진은 ▲큰 정치 ▲문민정치 ▲지역주의의 타파였다. 김 후보는 민주·국민당의 대통령후보 희망자나 후보들도 마찬가지이지마는 구호이상의 의미를 새겨놓지 못했다. 김 후보로서는 경선에서 이 3대 정치목표에 대한 그의 실천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큰 정치를 표방했으면 거기에 걸맞게 이 후보의 경선거부 사태는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세몰이가 큰 정치인가. 문민정치는 이제는 사실상 기틀이 잡혀가고 있다.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의 기여는 역사다. 그러나 아직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다. 공작정치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후보측이 경선거부의 가장 큰 이유의 하나로 내세웠던 「외압」이 이를 말한다. 국가권력기구가 대통령의 「사기관」처럼 전락돼서는 안된다. 김 후보는 「외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정적이 될것이 거의 확실한 이종찬의원과 그의 진영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 「외압」「정치보복」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김 후보를 측정해 볼 수 있는 첫 시험이라 할 수도 있겠다.
지역주의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나타날 것이 확실한 가공할 망국의 기폭제. 지금 대통령 선거가 4파전이 될지,5파전이 될지 예측불허다. 김 후보는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번만은 당선시키자는 지역 「콘센서스」는 다이아몬드처럼 굳다. 호남지역인들이 민주당의 김대중 공동대표 지지에 뒤지겠는가. 지역충성 앞에 이성과 양식은 설자리가 없다. 충남북,경기,강원,서울 등의 소위 중부권에도 제3의 선택의 여지가 있게될 것 같다. 이종찬후보가 8백여명의 부산·경남 대의원표 가운데 경선후보 등록때 그 지역에서 단 50인의 추천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김 후보의 바위덩이 같은 지역기반을 의미한다. 지역감정은 글자 그대로 감정이다. 반응에는 역반응이 따른다. 김 후보가 청와대의 주인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는 자명할 것이다. 큰 정치,문민정치,지역타파 구현의 싹을 보여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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