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원·지사 동시선거 관리상 무리/투개표 과정 복잡·특이… 부정유발 소지【마닐라=최해운특파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곳이 필리핀이다. 그러나 이번에 실시된 총선거는 공명선거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의 낙후·비효율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고 필리핀 국민들 스스로도 불평과 비웃음을 보이고 있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 부통령뿐 아니라 상원 24명,하원 2백명,주지사 73명,시장 1천6백2명,지방의회의원 등 모두 1만7천7백84개 공직을 동시에 뽑는 필리핀 선거사상 최대의 맘모스 선거이다.
이번 선거에는 무려 8만7천7백56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이같은 동시·통합선거는 필리핀의 정치·문화,행정관리 능력,정보처리 시설 등을 고려할때 처음부터 무리라는 소리가 높았다. 필리핀의 투표방식은 후보자 기호란에 0표로 찬선을 표시하는 일반적 방식과는 달리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이름을 일일이 기재토록 돼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는 모두 40여명 이상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일일이 써넣어야 한다. 그래서 투표용지는 이름을 쓰는 46칸의 공간이 있고 길이만도 40㎝에 이른다.
이같이 투표용지를 채우는데 보통 10분씩이나 걸린다.
후보자의 정확인 이름을 모두 외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투표장소는 국민학교나 중학교 교실을 사용하여 유권자가 책상에 앉아 이름을 쓰도록 하고 있다.
선관위 관계자들은 유권자가 20분이상 꾸물거리면 선거진행을 위해 빨리 나가줄것을 독촉한다. 알파벳을 못쓰는 문맹유권자는 오직 가족의 도움만으로 투표하도록 규정돼 있다. 각 후보 선거진영은 이같은 제도상의 허점을 선거전략에 이용,투표용지와 똑같은 모의용지에 자신들의 후보이름을 인쇄한 선전물을 유세장 밖에서 뿌리기도 한다.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이름만 쓰고 나머지는 공란으로 남겨두기 일쑤.
시장선거의 일부 운동원들은 유권자들에게 시장이름을 먼저쓰고 그다음 대통령후보란을 채우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교사인 알프레드 림씨(26)는 『어떻게 그 많은 후보이름을 기억하겠느냐』며 자신은 『대통령후보의 이름만 쓰고 나왔다. 이번 선거는 난센스다』며 고개를 저었다.
개표도 극히 비효율적이다. 복잡한 투표방식에다가 후보자가 너무도 많아 유효표 판단이 어려워 시비가 끊이지 않고 개표과정도 길어질 수 밖에 없다.
투표가 끝난뒤 적어도 1주일이 지나야 당락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이번 선거의 정·부통령 당선자는 오는 25일 특별 소집되는 의회서 당선은 선언토록 돼 있으나 개표지연과 부정시비로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
개표는 군 단위 선거구서 행해진뒤 분리된 투표용지는 군경호위 아래 시단위 선거구로 옮겨져 유효표를 재점검,결과를 성단위 선거관리 위원회로 보고하게 된다. 성선관위는 다시 이를 마닐라 중앙선관위에 보고한다. 마닐라에서는 집표결과를 재검토한후 최종 개표결과를 공식 발표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이때문에 투표가 끝난지 3일이 지났는데도 개표율이 20%선에 머물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답답한 유권자들의 궁금증을 달래기 위해 방송 신문 민간단체의 비공식 집계가 난무하고 있다. 선관위는 민간 집계 기관으로 「미디어 시민 신속집계」(MCQC)만이 개표결과를 비공식 집계,발표토록 허용하고 있다.
이멜다 후보는 『사설단체의 비공식 집계 발표는 국민들에게 혼란을 가져와 개표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음모의 가능성이 높다』면서 비공식 집계발표를 금지시킬 것을 선관위에 요구했다.
이에따라 14일부터는 각 TV와 라디오 방송의 비공식 집계발표가 사라졌다.
이번 선거양상과 투개표 제도를 볼때 필리핀 민주주의의 길은 아직 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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