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미 외교문서 61∼63베트남」서 밝혀져/국무부 1월·4월 보고서 “한국 참전 확실”/이미 알려진 “62년말 첫 공식거론”은 사실과 달라/5·16군사정부 “미 신임얻기” 방편책 소지【워싱턴=정일화특파원】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결심은 적어도 군사형명 정부치하이던 1962년 1월19일 이전에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 국무부가 비밀문서해제와 더불어 연차적으로 발행하는 「미 외교문서 1961∼1963년의 베트남」(20일자 발행)에 의하면 62년 1월19일자 국무부 보고문서엔 이미 『한국은 월남지원군 파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대목이 나와있다.
미 태평양지구 사령관의 정치 고문 에드윈 마틴(뒤에 월남주재 대사역임)이 1월19일자로 국무부의 베트남특별 기동국장 스텔링 케트렐에게 보낸 전문에 의하면 『태평양사령관 펠트제독은 한국이 월남을 도울 군대를 파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음을 언급했다』고 쓰고있다.
이 전문은 미 국방장관이 베트남과 태평양사령부를 순방하면서 월남전을 평가한 부분을 기록해 국무부에 보고한 형식으로 이뤄졌다. 태평양사령관은 국방장관에게 ▲월남전은 단순히 군사작전으로만은 이길수 없다는 것 ▲군사작전은 현재 실험중인 고엽작전이 얼마나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느냐에 성패가 달렸다는 것 ▲제3국의 지원문제는 우선 한국이 월남파병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 등을 말했다는 것이다.
또 1962년 4월27일자로 베트남 특별기동국장 케트렐이 해리먼 극동담당 차관보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월남정부와 이미 파병문제를 의논했으며 미국이 공식제의하면 동의할 것이 확실하다』고 쓰고 있다.
이 문서는 월남전을 효율적으로 진행키위해서는 외국의 지원을 받는 것이 좋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제3국의 지원은 연합군 형식보다는 개별지원국과의 협조형식으로 진행될수밖에 없다면서 각국 입장을 분석하는 것으로 돼있다.
가능성있는 국가지원국중 파키스탄,인도,인도네시아,일본,프랑스 등은 「불가」 또는 「불능」으로 분류했고 태국,말레이시아,호주,뉴질랜드,필리핀,대만 등은 「가능성 있음」 또는 「거의 확실함」이라고 분류했는데 유독 한국은 「확실함」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외교 문서에 한국의 월남전 참전이 가장 먼저 거론된 것은 62년말의 브라운 각서로 알려져있고,당시 국방장관이던 김성은씨는 한 증언에서 62년 여름 진해별장에서 박 대통령이 한국군의 월남전파병을 측근에게 비밀리에 거론한 일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군사혁명정부 아래서 반 혁명 모의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80년대 말에 감형돼 풀려난 전 최고회의 공보실장 원충연씨는 최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61년 11월 첫 미국방문 도중 한국군의 월남전 파견을 거론했다고 말했었다.
군사혁명 초기 박정희의장은 미국정부로부터 상당한 불신을 사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61년 11월 박정희의장의 방월로 이뤄진 박정희케네디회담에서 한국군의 월남전 파견문제가 거론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 외교문서는 이어 62년 5월15일자 전문에서 고딘디엠 월남대통령이 세계각국에 인도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특별 메시지를 보냈고 한국정부가 맨처음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62년 5월3일 한국정부는 월남전 현장조사를 위해 군사사절단을 비밀리에 사이공에 보냈으며 미 국무부는 한국 군사조사단이 월남전을 살펴본 후 그 결론을 월남정부보다 먼저 미국측에 알리도록 하라는 지시전문을 현지 대사관에 보낸 것으로 돼 있다.
62년 5월23일자 주월 미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 의하면 한국군사 조사단이 무사히 도착했으며 철저한 연락관계가 이뤄졌다고 보고돼 있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견사에서 한국군파병이 언제 처음 거론돼느냐와 월남에서의 한국군 작전권이 어떻게 처리됐느냐가 아직 연구대상으로 남아있는데 이번에 발표된 미 외교문서에는 월남파병 한국군의 작전권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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