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제37회 체신의 날이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근대적인 체신제도를 도입한 것은 조선조 말엽인 1884년(고종 21년) 4월22일 우정총국의 설치로부터 비롯됐다. 체신은 그후 민족의 역사와 함께 수난을 겪어오다가 60년대 이후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오늘과 같이 크게 자라났다. ◆고종이 개화파 홍영식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정총국을 세운 다음해인 1885년 9월28일 한성(서울)제물포(인천)간의 전신이 개설된 이후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사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91년말 현재 전화시설만도 1천7백51만여 회선에 1천4백57만여명이 가입,전화보급률은 세계 9위로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이다. ◆서울 안국동로터리에 자리잡고 있는 우정총국은 개혁정치가였던 김옥균선생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더 유명하다. 그당시 우정국 총판이었던 홍영식이 독립당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우정국의 개국축하연을 계기로 1884년 12월4일 거사하게 됐던 것. 갑신정변은 청,일과 서구열강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할때 일어난 자주독립 운동이었다. ◆이날의 우정국 개국축하연에는 수구파를 비롯한 중신들과 외국공사들이 초대됐다. 축하연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개화파가 계획적으로 방화하면서 소란을 피워 하객들이 황망히 도망가도록 꾸몄다. 수도경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우영사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아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중상을 입는 등 혼란이 왔다. ◆개화파는 5일 내각을 조각,정치혁신의 대망을 발표했으나 다음날인 6일 서울에 주둔한 청병 2천명이 궁궐로 몰려와 개화파를 뒷받침하던 일병을 몰아냄으로써 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서재필선생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홍영식은 서울에 남아있다가 참사했다. 갑신정변이 당시의 국내외 정세로 보아 성공할 수 없는 거사였지만 그 개혁정신은 면면히 살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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