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월29일 상오 서울 지법 대법정에서는 극악한 친일 인사들에 대한 반민특위의 두번째 공판이 열렸다.먼저 관동군 고문을 지낸 이종영이 나왔다. 공소장이 낭독된 후 검찰부가 일헌병대의 앞잡이로서 독립 투사 2백50여명을 체포케하고 그 중 20여명을 사형케 했던 혐의를 들어 『시인하는가』고 묻자 이는 길길이 뛰었다.
『나는 만주서부터 지금까지 공산당과 싸운 공산주의자다. 대한민국이 어찌 반공 투사를 처벌할 수 있는가. 나는 과거 장학량과 손잡고 항일 독립 운동도 했다. 내게 훈장을 주지 못할 망정 쇠고랑을 채울 수 있는가…』고 궤변을 늘어놨다.
일제때 악질적인 친일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는 제헌 헌법(101조)에 의거하여 구성된 후 49년 연초부터 친일 인사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실업가 박흥식을 필두로 33인의 하나인 최린,최남선과 이광수,비행기 헌납 운동을 벌였던 문명기,작위를 받았거나 고관을 역임했던 자들,「20세이상 조선인을 모두 전장에 내보내자」고 하여 오히려 일제를 놀라게 했던 김대우와 이성근 이원보전지사,재력가 변호사 문인 언론인등. 그리고 숱한 독립 투사들을 체포·고문·사형케 했던 노덕술전경시 김덕기전평북도경 고등과정 최연 하판락 양병일등 악질 경찰들을 검거했다.
그러나 이들은 공판에서 최린외에는 「어쩔 수 없어서」「국민을 편하게 하려고」「애국 행위로 알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가 하면 아예 『3천만 국민 모두가 반민자아닌가』라고 반문하여 국민을 분노케하기도 했다. 국민이 놀란 것은 과거 고문과 악행의 기술자였던 한인 고등계 경찰등 친일파들이 건국후 반공의 탈을 쓰고 이승만 정권의 각 요직을 차지한 채 여전히 국민 위에 군림하며 권세가와 모리배들로 둔갑한 것이다.
저명한 독립 운동가가 『일제 때 나를 고문했던 한인 악질 경관이 건국후 이박사에 반대했다고 나를 또다시 고문하는 슬픈 현실에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는 술회는 우리의 가슴을 친다.
친일파들을 처벌·척결하라는 국민의 한결같은 요구에 아랑곳 없이 이 정권의 비호 아래 경찰은 반민특위를 습격,특경 대원들을 구금·구타하는가 하면 특위위원들의 암살을 계획하기까지 했다.
민족의 정기를 유지하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맑게하고 늘 찌거기를 걸러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과거의 청산은 결코 단순한 감정과 보복을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 정과 오,공과 과,시와 비를 정확히 가리고 민족에 대한 죄과를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 또 민족에 대해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새역사 새대열에 참여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고 후대에게 엄숙한 역사의 교훈을 남겨줘야 한다.
우리의 경우 건국후 일제 잔재에 대해 당연히 잘잘못을 가리어 응분의 처벌을 한 뒤 이들의 새정부 참여를 배제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집권자는 처벌은 커녕 이들을 보호하고 적극 기용함으로써 출발부터 민족의 정기와 기강을 뒤흔들어 놓았다.
일제때 독립 투사들을 고문하던 고등계 형사 출신을 장관으로 기용했을 정도이니 무슨 말이 필요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살인범 안두희가 구명도생을 위해 또다시 횡설수설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백범 암살 사건의 진상도 실은 극악한 친일파들의 음모 죄행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만일 초대 이승만 정권이 친일 세력을 철저히 응징 정리하고 첫 내각을 백발이 성성한 독립 투사와 재야의 현재들로 구성했다면 어떠했을까. 비록 그들이 행정 경험은 없었다해도 피끓는 애국심과 바른 자세만으로도 이 땅에,아니 권부 주변에 부정과 부패가 감히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큰 풍토를 확고히 구축했었을 뿐더러 이러한 정기와 분위기는 오늘까지도 면면히 이어졌을게 분명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살인범의 횡설수설에 사회 전체가 뒤흔들려야 하는가. 차제에 정부와 국회 그리고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뒤늦게나마 역사의 찌꺼기를 척결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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