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 면담 기회도 안줘 “성과없이 빈손 귀국” 혹평/향후 대북한 관계에 영향 줄지 “관심”【동경=문창재 특파원】 일본 사회당 북한 방문단이 전례 없는 푸대접을 받고 돌아와 당 안팎에 뒷말이 분분하다. 잔뜩 별렀던 말을 꺼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온 헛수고를 못마땅해하는 소리들이다.
다나베(전병성)위원장은 1백13명이나 되는 대규모 방북단(국회의원 13명·각 지방 당대표등 1백명)을 인솔하고 김일성주석의 80회 생일 행사에 참석,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도 김일성·김정일부자와의 회담은 커녕,노동당 간부(김용순 국제담당 서기)를 만나는 것도 몇번씩 재촉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16일 일본으로 돌아오는 전세기 안에서 다나베씨는 애써 『김 서기와의 회담에서 핵사찰의 조기 수용 의사를 확인한 의의는 크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직자들은 『기대에 한참 못미친 성과』라고 혹평하고 있다. 한 동맹의원은 김부자가 다나베 위원장을 단독으로 만나주지 않은 것에 대해 『경축사절이 많이 왔기 때문이겠지만 정말 이번에는 너무했다』고 노골적으로 불평했다. 같이 간 자민당 사람들은 만나 주면서 우당 당대표를 그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회당측은 방북단 출발에 앞서 김 주석과의 회담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으며,잘하면 김정일과의 회담도 가능하다고 기대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경축 사절단 파견에 그 정도의 「답례」는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김일성주석은 14일 자민당 방북단장 이케다의원(지전행언·전방위청 장관) 일행은 만나주었으나 다나베위원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나베씨가 김 주석을 만난 것은 15일 금수산 의사당에서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줄지어 선채로 악수할 때 뿐이었다. 북한 방문의 최대 목표였다는 핵사찰 조기 수용 문제를 꺼낼 시간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다음날 김정일서기를 만난 것도 같은 형식이었다. 경축단의 일원으로서 겨우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 뿐이었다.
김용순과의 회담도 특별한 이유없이 약속 날짜가 이틀이나 늦어졌다. 귀국하는 16일 아침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자 다나베씨는 수행원들에게 호통을 쳐가며 회담 성사를 재촉했다고 한다. 김 서기 조차 만나지 못하면 정말 빈손으로 돌아가는 꼴이 됐던 것이다.
16일 상오 급조된 김과의 회담에서 다나베씨는 「말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핵심인 핵사찰 문제에 대해 김은 특별한 언질을 주지않고 며칠 전 북한 당국자들이 밝힌 「조기 수용」 원칙만을 되뇌었다.
또 한가지 목표로 삼았던 이른바 「일본인처 고향 방문」건에 대해서는 『전제 조건없이 실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잘되면』이란 꼬리가 붙었다. 그것도 다나베씨에게만 주는 「선물」이 아니라는 듯 『기네마루(김환신)선생과 잘 의논해서 통보해달라』고 했다.
북한은 방북단 교섭 단계에서는 『만일 사회당이 가네마루 부총재를 데리고 오면 일본인처 몇십명을 전세기에 태워 보내겠으며 김정일서기와의 회담도 가능하다』고 유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부자와의 회담이 불발로 끝나고 일본인처 고향 방문도 「조건부」에 머문 것은 「가네마루 대동」에 실패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어쨌든 이번 다나베 푸대접은 북한이 이제는 일본 사회당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네마루를 움직여 수교 회담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것만으로 사회당의 효용은 끝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증거이다.
뒤늦게 짝사랑이었음을 깨달은 사회당이 앞으로 북한과의 관계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궁금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방북에 앞서 일조 우호 협회 창립준비위원회까지 서둘러 최대한의 성의를 표했던 사회당이다. 오는 6월 중 우호 협회는 정식 출범하게 돼 있고,그 자리에 김용순서기가 참석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과연 종전과 같은 열성으로 사회당이 협회 설립의 주도권을 행사할 것인지,수모를 당한데 대한 불쾌감을 어떻게 표할 것인지,관심사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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