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관동군 헌병대 출신… 소군에 체포·탈출 월남/방첩대장등 요직… 56년 군수뇌와 알력 피격사망백범 김구선생 암살 배후로 드러난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아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자신도 끝내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김창룡은 한남 영흥에서 태어나 일제하에서 관동군 헌병대 오장으로 소만 국경지대에서 암약하던 중국 간첩단을 색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김은 해방후 이같은 친일행적이 드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당국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열차편으로 사형장으로 끌려가던중 열차창문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월남했다.
그후 김은 「생존을 위해」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입대한후 47년 다시 육사 3기생으로 입교했다.
장교임관후 과거 관동군 시절의 정보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정보부대 창설의 실무책임을 맡았으며 이를 계기로 좌익세력 제거에 앞정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사건」 「동해안 반란사건」 등 큼직한 사건을 잇따라 해결,당시 이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김구선생 암살사건 직전인 49년 6월 특무대의 전신인 방첩대(SIS) 대장으로 취임한 김은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씨와 잦은 접촉을 가졌으며 사건후에는 본격적으로 안씨를 챙겨 당시에도 안씨의 배후인물로 거론됐었다.
김은 6·25가 발발하자 종신형을 선고받고 육군 형무소에 복역중이던 안씨를 지프에 태워 방첩대로 데려가 곧바로 안씨를 현역에 복귀시켰으며 그후 안씨가 육군대령까지 진급하는데 적대적인 후견인 노릇을 했다.
후에 현역 복귀과정이 문제돼 안씨가 군에서 예편한 뒤에도 김은 안씨가 각종 군납이권을 얻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김은 이 대통령의 총애를 등에 업고 좌익색출을 내세워 위세를 부리다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56년 당시 군부대의 실력자였던 정일권 참모총장과 손원일 국방장관 등에게 타격을 주기위해 「원면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김은 1월30일 서울 청파동 출근길 짚차 안에서 허태영대령 등이 내세운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파란만장한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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