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선생의 암살 배후가 비극의 그날에서 43년이나 흐른 이제사 백일하에 드러났다. 민족의 지도자를 흉탄에 쓰러뜨린 암살자는 구차한 연명을 후회하듯 역사 앞에 입을 열었다. 암살자 안두희의 고백과 진술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어 암살사건 이상의 충격을 던져준다. 백범의 최후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면 암살의 배후는 천지를 흔들듯하다.과연 배후는 누구이며 그 정체가 무엇인가. 암살자의 진술은 전율을 일으킨다. 암묵적인 지령은 당시 육본 방첩대장인 김창룡이 내렸다고 밝히고 있다. 배후엔 방조자가 또 있다. 미국 CIA의 모태인 그때 OSS소속의 어떤 미군 중령이라는 것이다. 두사람의 교량역은 해방과 건국시대 정국의 두 거물급 정치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진술이 백범암살의 전모라고 판단하기엔 이르지만,자칫 영원한 수수께끼로 덮어질 뻔한 우리 현대사의 진실의 가닥이 바로 잡혀갈 계기가 잡힌 것은 다행스럽고 감회가 깊다고 할 것이다. 외세와 이념에 의한 남북분단의 해방정국은 민족지도자들이 잇달아 암살로 쓰러진 유혈의 시대였다. 해방의 감격은 불안과 혼란으로 갈피를 못잡았으며 냉혹한 정치투쟁은 민족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우게 하였다. 무엇보다 백범의 암살은 건국의 환희에 찬물을 끼얹고 온나라가 상가로 변하는 비운을 몰아왔다. 경교장의 총성에 하늘이 울고 땅이 울며 민족이 통곡했다. 그럼에도 이 엄청난 슬픔을 달래줄 역사의 진상은 정치적 흑막에 가려져 침묵과 암흑의 시일을 덧없이 보내야 했다.
그후 암살자 안두희는 종신형을 받고서도 6·25와 더불어 현역에 복귀하고 대령까지 승진한뒤 제대하여 권력의 비호로 삶을 누려온 것이다. 암살자는 이런 과정에서 번번이 단독 범행임을 우기면서 배후를 숨기는 간교함을 고집했다. 그는 역사의 대의보다 신변의 안전이 중요했으며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정기가 이런 왜곡과 은폐와 인위적인 불명을 용서할 까닭이 없다. 「43년의 비밀」을 집요하게 추적한 민족정기구현회 일행의 쾌거는 청사에 새겨질 것으로 확신하는바다.
역사란 진실을 발굴하는 작업이다. 정치와 권력의 권모술수라는 껍질을 벗겨서 도려내고 밝힐 것을 떳떳이 밝히는 엄숙한 과업이기도 하다. 백범의 암살과 배후는 역사의 기록에 묻혀가지만 그 역사는 여전히 살아있는 현실로 우리 앞에 버티고 서있다. 지금 우리는 현대사를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다. 일본 관동군 정보요원과 일제 고등경찰의 개입설도 그 진위가 드러날때가 올것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경건하고자 한다. 외세와 정치의 농간이 어떤 비극과 불행을 초래하는지 뼈아프게 깨우쳐야 한다. 이것이 역사를 생동하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세일 것이다. 1949년 6월26일의 백범의 최후는 역사의 교훈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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