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의 두 기둥이랄 수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6,7일 3백척 이상의 군함과 비슷한 수의 항공기로 편성된 흑해함대에 대한 통제권을 각기 선포하여 그동안 지속된 갈등과 혼선이 더 얽혀가고 있다. 흑해함대 지휘권을 둘러싼 두 나라의 대립이 표면화한 것은 지난 1월4일이었는데 3개월이상 밀고 당기고도 해결을 못보고 제각기 통제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구 소련체제가 와해되면서 다른 분야에도 혼란이 있지만 군부의 경우가 특히 예각적이다. 러시아계 병사가 카자흐에서 성장한 벨로루시여인과 결혼하고 우크라이나 주둔부대에 복무한다면 그는 어느나라에 충성을 바쳐야할지 망설이게 된다는 빈정거림이 나오는 정도다. 그래서 CIS구성국들이 자국내 군대를 통제하겠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철권통치를 하던 스탈린은 30년대초 심복 포스티셰프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하여 현지 정부와 당에 대해 무자비한 유혈숙청을 단행했고 그래서 포스티셰프는 「우크라이나인의 교살자」란 별명을 듣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출혈은 그게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9세기에 정착한 이래 러시아 폴란드 등 이웃 나라들로부터 거의 쉴 사이없이 공격받고 탄압받아왔다. ◆공산혁명후 레닌은 1919년 12월28일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공개서한으로 밝혔다. 그러나 1930년 세르히 예프레모프를 중심으로 한 45명의 우크라이나 지식인이 체포되고 1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933년엔 현지 공산정부의 유리 코추빈스키 등이 총살당했다. 몇사람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7년,1939년엔 각각 총리가 총살당했다. 이런 아픈 역사 뒤끝이기에 소연방 해체를 맞아 우크라이나가 독자군을 가지겠다고도 하고 자국내 주둔군에게 충성을 요구한 것도 모두 지난날의 탄압을 다시는 받지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흑해함대에 대한 통제권주장도 실제 「행사」를 목표로 했다기보다는 독자군 창설을 지향한 디딤돌로서의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