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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장­./김창열 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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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장­./김창열 칼럼(토요세평)

입력
1992.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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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연 안기부장께­.바쁘시겠지만 한담을 좀 하겠습니다.

「007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1908∼1964)이,그 자신 제2차 세계대전중 영국 해군첩보부의 뛰어난 요원이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창작한 영웅 제임스 본드는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일면도 없지 않습니다. 작중의 제임스 본드는 해군중령입니다. 미녀를 포함한 사생활의 최고급 취향도 두 사람이 비슷합니다.

플레밍에게는 선배가 있습니다. 「제3의 사나이」 「조용한 미국인」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1904∼1991)입니다. 국제색 짙은 그의 스릴러는,아프리카에서 외무성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을 깔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역시 그린에게도 선배가 있습니다. 서머싯 몸(1874∼1965)입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나 곧 정보요원으로 변신,스위스를 근거로 한 그의 활동은 10월 혁명 소용돌이 속의 러시아에까지 미쳤다고 합니다. 이때 그의 체험은 그의 단편소설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세사람에게 공통된 것은 부유한 상류계급의 명문학교 출신,성장과정이나 전력으로 해서 국제적인 교양이 풍부했다는 것 등입니다.

이같은 영국지식인의 계보아닌 계보는 영국적 전통의 한 나타남이라고 합니다. 그 전통이란 외교는 패권국가 영국 상류사회의 특권이며,그 일환으로서의 국제 정보공작은 말하자면 그들이 기꺼이 참여하는 「신사의 게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제,「높은 신분에 따르는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일은 은밀하되 어두운 그림자는 없습니다. 2차 대전때의 영국이 대독정보전을 이긴데 까닭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같은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는 나라인데도 「높은 신분」이 따로 없는 탓인지,영국 같은 「게임」의 전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년대말 일본의 암호해독 필요성이 제기됐을때,당시의 스팀슨 국무장관이 『신사는 남의 편지를 펴보지 않는다』는 말로 암호해독 기구의 창설을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2차대전중 일본군의 암호를 완전 해독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전쟁뒤 패권국가로 자란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등 강력한 정보기구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CIA의 초대국장이 명문출신인 덜레스 국무장관의 친동생,50년대 이란의 모사데크 좌파 정권을 전복시켜 팔레비왕을 복위케 했던 CIA 공작책임자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이었다는 사례들은 영국식 「게임」의 전통같은 것을 엿보게 합니다.

좀 길어졌습니다만,이 한담의 뜻은 몇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정보 활동이 불가결한데,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사의 게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사」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을만큼 그 영역이 따로 정해져야 하고,최상급 두뇌를 모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을 수는 없겠으나 국가정보 활동은 「신사의 게임」이어야 한다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미묘하고,또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부장이 새로 책임진 우리 안기부는 어떻습니까. 과연 「신사의 게임」을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이 물음에 대한 지금 나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이번 총선기간중에 있은 안기부 요원의 흑색선전 사건이 그 실증입니다. 여기 드러난 영역일탈과 저질성은 숫제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취임초 부장에게 이렇게 하기 거북한 말을 하는 것은 이 부정적인 측면에 바로 새 부장의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기부를 「게임」의 영역을 엄격하게 지키는 두뇌집단으로 탈바꿈 시키는 일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신사의 게임」을 수행해온 많은 부원들을 위하는 길도 될 줄 압니다.

이 글을 쓰면서,부장은 일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년 이맘때,부장은 강경대군 치사사건의 뒷수습인사로 내무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뒤 1년사이 경찰청 독립,지자제 부활,14대총선 관리 등의 큰 일이 따랐습니다. 이 모든 일을 관계에 흔한 말로,대과없이 치러냈기에,다시 안기부장으로 승급이 되었겠습니다만,새 자리 역시 사고 뒷 수습과,그 사고로 해서 흐트러진 안기부 위상을 바로 세우는 과업을 안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시기적 특성은,지난 사고가 아니더라도,안기부의 탈바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북이 모두 권력의 교체기를 맞고 있는데다가,잠시 풀리는 듯하던 남북관계는 핵문제에 걸려 앞이 불투명하고,국제환경의 변화 또한 대단히 급박합니다. 그야말로 안기부가 「신사의 게임」 능력을 테스트 받는 형세가 아니겠습니까.

이만하면 부장의 일 복이 많은 것은 물론 안기부가 어떤 전환점에 이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부장은 부장대로의 구상이 있을줄로 압니다. 하지만 안기부 전환의 방향은 6공 발족이후 거듭거듭 논의가 되어 왔으므로 거의자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중 자강 요긴한 요청이 안기부의 정치적 중립에 있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침 미국 CIA가 게이츠 새 국장을 맞아 시도하고 있는 변신 방향도 참고할만 합니다. 그 요점은 경제정보 중시,정보의 공개운영,정치적 악용차단 등 입니다.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큽니다.

끝으로 부장에게 거는 기대를 거듭 밝혀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일 복 많은 부장이 취임할때의 안기부와,퇴임할때의 안기부가 얼마나 달라질 것이냐­입니다.

나는 이 기대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닌줄로 확신합니다.

부장의 성찰과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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