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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필사즉생/오인환(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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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필사즉생/오인환(화요칼럼)

입력
1992.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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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았으면 선거일에 임박해 연이어 터져버린 세개의 악재는 총선정국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민자당의 절대안정의석 확보를 허용하지 않는 선의 미풍으로 끝났다. 왜 그랬을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역시 민주화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유권자들의 인식이 충동적이고 과격한 반응을 자제시켰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재벌당의 출현이 정부와 민자당을 괴롭히고 정주영 국민당 대표의 원색적이고 강도높은 대통령비방이 민자당의 세감소를 초래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자당의 괴멸을 막아주는 「민주화의 산 증거」가 돼주었던 것이다.그러고 보면 무능과 실정이라는 비난속에서 노태우대통령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럭저럭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져놓은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케 한다. 그러나 88년의 4·26 총선에 이은 이번 총선의 패배는 「민주화의 실적」이 더이상 그에게 방패막이가 되고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가르쳐 주고있다. 오히려 대세가 역전돼 한국경제의 남미형화에 문을 열어준 사람으로 꼽히게 될지도 모르게 되었다.

○언행불일치 실패원인

억압과 갈등구조의 독재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열망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은 매우 어렵게 출발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유사이래의 흑자기조를 물려받았고 민주화의 선물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절망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왜 경제에서 실패했으며 내정에서 무력했다는 평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은 두고두고 역사에서 해답을 찾게될 것이다.

한가지 원인만 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언행불일치에서 비롯된게 아닌가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통령은 6·29선언을 하면서 죽기를 무릅쓰고 임하면 살게된다(필사즉생)는 자세로 일해나가겠다고 했지만 지난 4년간의 모습은 그런것 같지가 않았다. 취임초부터 후반기 누수,퇴임후의 위상을 우려하는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중간평가를 공약했다가 이행치 않았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안한다고 했다가 3당통합을 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내각제 개헌문제가 등장해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곤 하였다.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고 지자제 약속도 식언이 되었다. 경제정책이 일관성을 잃었고 정부인사가 공평성과 형평성을 상실했다. 상황변화에 따라 입장이나 정책을 수정하거나 변경시킬 수 있는 문제이긴 하나 원칙과 당위성을 놓고 볼때 「약속」과 「실행」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그같은 흐름은 종국에 가선 국정의 지표가 흔들리고 국가지도력이 일관성을 결여한 것처럼 국민의 눈에는 비쳤던 것이다.

그런점과 관련해 우리는 대통령의 「용어(Terminology)의 정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고형의 정치가인 노 대통령은 연초 TV기자회견에서 후보자문제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공세에서 수사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듯이 심사숙고를 통해 말과 행간을 골라쓰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게 마련이지만 진실성이 의심되기도 하고 실행력이나 집행력이 뒷받침되지 않을때 공허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6공이 앞서의 약속이 공약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말을 계속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같은 국민의 공허감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수사의 악순환은 끝내 대통령의 행동의지를 불신하는 국민적 혐오감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의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으로 알려져 있다. 천성이 그러한 것인지 위관시절부터의 정보업무에서 익힌 정치감각 때문인지 여부는 분간키 어려우나 밑의 사람을 잘 다루려면 「본심을 드러내면 안된다」고 가르친 한비자나 마키아벨리의 주장과 유사점이 없지 않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의중을 읽히게 하지 않은채 계산된 발언으로 사람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책략을 쓴다는 개념이 된다.

그같은 책략이 부하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효율성에서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나 4천몇맥만의 주권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사정이 호락호락 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민주화 시대에서 벌거벗은 처지이면서 정치권으로부터 스스로의 권위를 지켜내는 일은 잘 해낸 셈이지만,지금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듯이 대국민 정치에서는 「내정실패」라는 채점표를 받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책임지는 적극자세를

이제 대통령은 임기의 11개월만 남겨놓고 있고 공천권 등 정치권을 장악할 권력의 방편도 더이상 갖고있지 않기 때문에 본격적인 레임덕 현상에 부딪치게 돼있다. 때문에 대통령은 한계에 이른 통치방식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제 남북문제와 경제난 타결에만 주력하겠다』는 식의 수사는 쓰지 말아야 한다. 말은 그럴듯 하지만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통령을 대신해 경제현안 등을 제외한 나머지 국사를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고,또 가능하리라고 국민이 믿지도 않는다.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감독자나 채점자같은 기묘한 위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책임지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전환해야 한다.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필사즉생의 자세로 되돌아가야 한다. 미평가 상태지만 경제를 공부하고 경제각료를 일할 수 있게 지원하고 보호함으로써 한자리수 물가안정을 이룩해낸 전임자의 집념과 추진력을 참고해야 한다.

행운이기도 하지만 노 대통령은 명실공히 문민정치 시대를 여는 대통령선거를 관리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건국이래 가장 공명정대한 선거가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후반기 누수차단이 될 것이다. 국민여론이 차단벽이 돼 줄 수 있기 때문이다.<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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