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부 부패척결 본보기로 “철퇴”/정재호·이정림 등 거물급 다수체포/이병철 등 8명은 재산헌납 발표도/경제건설 논리에 처벌완화… 다시 정경유착 조짐5·16 발발 12일만인 61년 5월28일. 남산 밑에 자리잡은 옛 일신국민학교 교정. 어둠속에서 수명의 기업인들이 수갑에 묶인채 파랗게 질려 학교 강당에 마련된 특별구치실로 속속 연행됐다. 삼호의 정재호,개풍의 이정림,설경동(대한그룹),남궁련(극동해운) 이용범(대동공업),조성철(중앙산업),함창희(동립산업),최태섭(한국유리),박흥식(화신) 등 이었다. 당시 재계를 주름잡던 기업인들이 혁명군 특별수사대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일본에 머물러 있던 이병철과 백남일,이양구 등에게는 구속명령이 내려졌고 이틀 후인 30일에는 대한제분의 이한원과 조선견직의 김지태 등이 추가로 구속됐다. 금성방직의 대표였던 홍재선씨도 추가 구속자 명단에 포함,구속된 것으로 알려졌었으나 후일 홍씨는 『당시 구속자 명단과 석방자 명단에 포함돼 석방 발표시에는 여러곳에서 축하전화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는 조사만 받았을 뿐 실제 구속되지는 않았었다』고 밝혔다. 이어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리법을 공포했다. 과도정부와 민주당 정부에 의해 추진됐던 부정축재자 처리를 혁명정부가 맡아 재계에 철퇴를 내렸다.
재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했다. 분위기와 강도면에서 전과는 사뭇 달랐다.
부정축재자의 범위는 1953년 7월1일부터 1961년 5월15일까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한 자로 정의됐다. ①공유재산이나 귀속재산의 매매를 통해 1억환 이상의 부정이득을 본 자 ②부정한 방법으로 10만달러 이상의 외환을 대출받거나 매입한 자 ③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고 5천만환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④공사도급이나 정부 구매에서 담합이나 수의계약을 통해서 2억환 이상의 부정이득을 취한 자 ⑤외자구매 외환의 배정을 독점하여 2억환 이상의 부정이득을 취한 자 ⑥2억환 이상의 국세를 포탈한 자 ⑦재산을 해외에 도피시킨자.
퇴계로 옛 해군본부 자리에 차린 부정축재자 처리 위원회 사무실은 아연 활기를 띠었고 수사는 피치를 올렸다. 7월21일 중간발표때 기업인들의 축재액은 7백26억환에 달했다. 분위기도 살벌했다. 마포형무소에 오너들을 감금시킨 부정축재 처리위원회의 군인들은 각 기업을 돌며 부정축재 내역을 조사했다. 몇몇 장교들은 본보기로 부정축재자 몇명을 총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에 있던 이병철은 6월19일 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자신의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재호 함창희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 남궁련 등 일곱명도 자신들의 재산 모두를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공동 결의문을 최고회의에 보냈다.
6월26일 김포공항에 내린 이병철. 『지프에 올라 명동의 메트로 호텔로 연행됐다. 다음날 공항에서 나를 연행했던 청년이 찾아와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이 기다린다고 했다(이 청년은 후일 국회의원과 무임소 장관을 지낸 이병희였다). 지프를 타고 도착한 곳은 후에 원호처 청사가 된 참의원 자리였다. 비서실(당시 비서실장은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을 거쳐 1백여평 돼 보이는 넓은 방에 들어섰다. 검은 안경을 쓴 강직한 인상의 박 부의장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몰랐다. 그러나 부정축재자의 처리는 국가운영에 타격을 주지않는 범위에서 진행돼야 하고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해야 한다는 요지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표정이 굳어졌던 박 부의장도 차차 이해하게 됐는지 재차 만날 것을 요청했다』 29일 호텔 연금에서 풀려난 이병철의 회고다.
이병철의 경제우선 논리가 주효했는지 하여튼 이튿날인 6월30일 부정축재 처리위원회는 조사를 일단락 짓고 구속자를 모두 석방했다. 당시 구속으로 광복 이후 공산당에 의한 감금과 반민특위 구속에 이어 세번째 감금당한 박흥식은 『43일만에 풀려나던 날 나를 석방하러 온 육군대령은 정중하게 박 부의장 댁에서 저녁식사가 준비됐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뜻하지 않던 초대였으나 사양했다』고 회고했다. 서슬이 퍼렇던 당초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조사를 끝낸 처리위원회의 이주일 위원장은 『이들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는 발표까지 했다.
8월3일. 기업인들이 갖고 있던 은행 주식이 모두 국고로 환수되고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 벌과금이 각 기업주별로 통보됐다. 30개 기업에 총 83억환 이었다. 이병철 24억환,정재호 10억환,이정림 5억5천만환,이한원 4억환,설경동 3억3천만환… 그러나 12월30일 발표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42억2천8백만환으로 밝혀져 결국 통고된 금액은 절반으로 줄었다.
부정부패 일소의 한 본보기로 서슬 퍼렇게 시작된 부정축재자 처리문제는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정권과 경제계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후부터 정권과 재벌은 경제개발 이라는 기치아래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국가 경제력을 키우는 주역으로 자리잡지만 60년 4·19 이후 61년말까지 계속된 부정축재자 처리과정은 오늘날까지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당시 대표적인 기업가들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하여 체포 벌금을 내게 하는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에게 재벌의 이미지는 실추됐다. 즉 재벌은 부정축재라는 등식을 일반화 시킨 것이다. 둘째 정부와 기업의 위상관계에서 정부 우위가 확고하게 됐으며 부정축재 환수과정에서 은행주를 우선 환수함으로써 정부가 돈 줄을 쥐고 기업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인들에게 정권의 비호를 받아야만 안정적인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됐다는 점이다.
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돼 온 이같은 정권과 재벌과의 유착관계는 사실 이번 총선을 분기점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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