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한 얼굴엔 불신감만이…남녘으로 가는 봄길은 길멀미가 나지 않는다. 먼 산과 가까운 들 모두가 새로 핀 봄꽃들의 축제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목련 매화 살구 산수유…. 꽃잎을 스치고 언덕빼기 황토길을 올라가는 바람의 허리통 또한 싱싱하다.
배꽃이나 복사꽃은 아직 이른 철이다. 한달쯤 뒤 이들이 만개할때 나주나 영산포 언저리의 야산들은 또 한번 꽃들의 해일,꽃들의 사태를 경험하게될 것이다. 이 때쯤이면 대책이 없다. 제아무리 삶에 쫓기고 풍광의 변화에 무덤덤한 사내라 할지라도 붉어오는 낯빛과 함께 으억 꽃멀미를 토하게 된다.
차는 어느덧 함평읍에 닿는다. 이곳 기산국민학교 교정에서 합동선거유세가 있을 예정이다.
예정 시각이 거의 다 돼가는데도 운동장 풍경은 의외로 한산하다. 연단 바로앞 「로열석」에 앉아 있는 청중들이 보이지 않는다. 청중들은 운동장 담장을 따라 연단 뒤쪽에서 삼삼오오 서성일 뿐이다. 확실히 이런 풍경은 이례적이다. 기왕의 선거같으면 연단 바로 앞의 자리는 후보자들의 운동원들이 기를 쓰고 확보하려 할 것이었다. 어쩌면 새벽부터 진을 치고 있어야 정상적인 풍경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연단앞에서 운동장 한 가운데까지가 텅 비어 있다.
이곳이 그래도 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격전지」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풍경이 있다면 포장마차들일 것이다. 군데군데 이들이 타고왔을 화물트럭들이 보인다. 전북·충남·강원,번호판이 다양하다. 확보된 기동력을 바탕으로 전국의 예상격전지역을 찾는다.
이들이 격전지를 영업구역으로 삼고자하는 이유는 하나,장사가 잘되기 때문이다. 전북 김제에서 왔다는 한 포장마차 주인에게 격전지역을 고르는 「감」이 있느냐 물었더니 꽤 합리적이다.
우선은 서울과 지방을 망라한 예닐곱 개의 신문을 펼쳐놓고 화제의 선거구를 정리한 다음 중첩된 선거구를 찾는다. 그리고는 입후보자의 수가 많은 순서대로 영업구역을 옮기게 된다. 입후보자의 수가 많아야 영업시간이 늘고 수입 또한 자연히 늘기 때문이다.
이윽고 선관위에서 후보추첨을 알리는 방송을 한다. 운동장 주변에서 쭈뼛거리던 청중들은 그때서야 서서히 자리이동을 한다. 소란스럼이나 분주함은 역시 느낄 수 없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걸음처럼 느릿느릿 연단 앞으로 몸을 옮기는 것이다.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 바지춤에 손을 낀채 망연한 표정들이라 보아 무방할 정도다. 4년전 선거때만 하더라도 분명히 달랐다. 이들은 「확실히」 지지하는 후보를 무등 태우고 농악이나 풍물을 치며 읍내를 돌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무지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까놓고 말했지라우. 시방은 다르요. 오늘 이야기하는 것이나 좀 들어볼라고…』
눈에 눈곱자국이 있어뵈는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지지하는 정당을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위아래를 한차례 훑는다. 싸늘한 눈빛 속에 오늘의 우리 정당정치가 처한 현실이 담겨있다. 신뢰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세장에 나온 이유가 있다면 순정한 단한가지 이유,기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윽고 후보연설이 시작됐다. 첫 후보는 이곳 지지기반의 정당에 공천신청을 냈다가 탈락한 무소속 인사였다. 영입케이스인 그는 서울법대 학생회장출신으로 자신이 조직강화 특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돈」때문에 밀려났음을 강변했다. 그러고도 당선이 되면 곧장 DJ를 돕겠다고 해다.
11·12대 의원 경력이 있는 여당후보는 자신만이 유일하게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실제적 인물임을 강조했다. 좀처럼 박수가 없자 그는 「옳은 소릴하면 박수도 좀 쳐요」하고 능숙하게 박수를 유도했으나 억지춘향이였다.
마지막 후보는 당적을 최근 두번 바꿨다. 신민주공화당에서 민자당으로 그리고 다시 민주당으로. 언론이 핸디캡으로 보는 그 이력을 그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스스로 해석해 냈다.
합동유세는 끝났다.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괜찮은 인물이 있던가요?」 나는 몇번이나 이런 질문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왜?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낙망케 했는가? 명색이 현대한국 정치판에 몸을 담고있는 인사라면 정사를 막론하고 가슴을 후비며 아파해야 할 것이다. 자연의 풍광에 걸맞는 삶의 축제는 언제나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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