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장에서 만난 친구 셋이 어울렸다. 다음은 그 술자리 정담의 녹음이다.『어때,이젠 작심했나』
『글쎄,유세장에서 보아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그 말이 그 말같고,그렇다고 시덥찮은 지역공약에 한 표를 던질수도 없고. 아무래도 선거공약까지 보고 정해야겠어』
『나도 그래. 신문을 보면,사람보다는 정당을 보고 찍어라,정책을 보고 찍어라했던데,역시 지금같아서는,차선이든 차악이든,사람을 보고 찍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애』
『그야,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를 말하는 것이니까,정치발전을 위해서는 정당중심으로 투표를 하라는 말이 옳지. 그러나 우리 형편이 어디 그런가. 마구잡이 공천으로,파렴치 전과자까지 내세우는 판이니,사람을 가릴 수 밖에. 지난 13대 총선은 정당중심 투표가 많았던 셈인데,그러나 보니 저질 국회의원이 나오고,또 지역감정이 드러나서 나라가 동서로 쪼개지는 꼴이 됐잖아. 사람보고 찍는 것이,적어도 정치의 지역편향을 줄이는데는 도움된다고 봐』
『정책이나 공약은 어찌하고?』
『글써,그 공약이란 것이 듣기 좋으라고 두리뭉실하게 내놓은 것 아니면 시 의원·구 의원들에게나 알맞을 것들이니 어쩌겠나. 서로 비슷하거나,돋보이지만 실현성이 의심스러운 것 뿐인걸』
『그래서 이번 총선에는 쟁점이 없다』
『겉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진짜 쟁점은 따로 있는 것 아닌가. 바로 다음 대통령 선거야. 이번 총선결과로 당장 정권이 바뀔 것도 아니고,정책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도 없겠지만,선거뒤의 판세가 다음 대권의 향방을 가늠한다 이것지. 이 이상의 쟁점이 어디 있겠나』
『그건 그렇지만 그 선거뒤 판세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직은 알 수가 없지. 하지만 몇가지 시나리오는 그릴 수가 있어』
『그려보시지』
『먼저 여당이야. 여당은 「안정」을 내세우고 있지. 안정다수=안정 과반수,구체적으로는 지역구만을 따져서 「1백19석+알파」야. 부자연스럽게 많은 거여의석은 어차피 줄어들게 마련이니까,의석이 줄되,얼마나 줄어느니냐로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래서,시나리오 ①은 민자당 압승의 시나리오야.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여당+일부 무소속」이 개헌선(1백58석)을 확보하는 경우. 이때는 내각제 개헌론이 되살아 날 수가 있겠고,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김영삼씨는 용도폐기. 필시 꼴 불견의 정치분란이 일어날거라.
다음은 여당 패배의 시나리오 ②,여당이 과반수 미달인 경우야. 무소속을 영입하는 등의 소동이 나겠지만,이때도 김영삼씨는 총선패배의 책임을 물어 용도폐기. 이 틈의 분란은 말할 것도 없고,여소야대로 인한 정국불안도 그리 반가울 것은 없찮을까』
『그럼 야당은?』
『민주당은 지금 「견제세력」이 목표야 「양바퀴론」이지. 아무래도 단독 과반수까지는 생각않은 것 같아. 그렇다면 민주당의 목표는 「독자 개헌저지선(79석)+알파」,승패는 「알파」의 크기에 달렸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그려 볼만한 사니라오는 그 「알파」가 마이너스인 경우,민자당 참패의 시나리오 ③이야. 이 역시 별 가능성은 없지만,그런 결과가 나온다면,김대중씨는 도중하차,덩달아 다른 김씨도 존재가치를 잃는다. 그 이후는 점치기가 어려우나,전망 가능한 행태는,새로운 야권통합,소수당의 극한투쟁,개헌세력과의 악수 등이 아니겠나』
『그밖에,변수는 없나』
『국민당 말이로군. 국민당의 1차 목표는 교섭단체(20석) 구성,승패가 아니라,당의 존폐가 여기 달렸다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이때의 의미있는 시나리오는 국민당이 「20석+알파」의 의석을 차지하는 시나리오 ④뿐이야. 화제는 이 경우가 가장 풍부할지 모르지. 무엇보다도 우리는 망팔십의 대통령 후보자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거든. 정주영씨의 77세 나이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이승만박사가 초대 대통령 취임할때 나이 73세,미국 역사상 최고령인 레이건 대통령이 연임 8년뒤 퇴임할때가 나이 77세와도 비교된다는 것이지.
또 「20석+알파」의 「알파」가 커져서 국민당이 캐스팅 보트를 쥐는 경우도 따로 생각할 수가 있지. 이때는 정국의 예측가능성이 크게 떨어질거야. 그래도 지금까지의 여·야당은,좋든 싫든 그 정치행태를 짐작할 수가 있었는데,그렇지못한 제3세력이 캐스팅 보트를 잡는다면,그 세력이 좌할지,우할지 아니할 말로 그 세력이 개헌파와 손을 잡을지,또 다른 계파와 연계할지,누가 알겠나. 그래서 정국은 유동적으로 되고,그런 뜻에서 불안정해진다는 전망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래 시나리오는 다 재미있다. 그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어느 것이지?』
『그야 모르지. 하지만,황금분할 같은 것은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애. 말하자면 적정균형이지. 요컨대 여당의 「안정」과 야당의 「견제」를 다 만족시키는 선이야. 여·야당의 총선전략이나 목표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날치기나 일방적 의사진행은 엄두못낼 정도의 안아아수,반면에 토론과 협상을 담보하기에 충분한 안정견제 세력의 창출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지. 이 경우 대선은 다시한번 양김대결이 되겠지만…』
『그래서 우리더러 그런 선거 뒤 판세까지 내다보고 정당중심으로 투표하라는 건가』
『꼭 그런말은 아니야. 하지만 정당을 고른다는 관점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나는 양당제가 좋고,정치가 유동불안정한 꼴은 보기가 싫어. 내표가 사표로 되는것도 싫고. 그러니 내 선택은 양당택일뿐이야』
『그럼 공약은 고려 밖인가』
『아니지. 막판에라도 이렇게 공약하는 사람이 있으면,나는 그에게 표를 주겠어. 대강 이런 공약이야.나는 깨끗한 선거운동을 했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선거가 끝나면 경리장부 일체를 공개·공시하겠소. 거기 흠이 있다면 즉각 의원직을 사퇴할거요. 사퇴서를 미리 써서 유지들에게 맡겨도 좋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래도 투표는 해야지. 언젠가 읽은 얘긴데,1차 대전때 프랑스의 클레망소 대통령은 『전쟁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라서,군인들에게만 맡겨 둘 수가 없다』고 했다더군. 그 무렵 하급장교이던 드골은,그가 대통령이 된뒤,이런 말을 했더래. 「정치는 너무나 중대한 일이라서,정치꾼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둘 다 옳아. 그말을 본 따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 않을까.선거는 너무나 증대한 일이라서,그 향방을 정치꾼이나 부동표에 맡겨 둘 수는 없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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