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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풍)은 바람(희망)이다/김승희 시인(총선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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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풍)은 바람(희망)이다/김승희 시인(총선현장에서)

입력
1992.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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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많으면 시선 날카로워야봄날씨답지 않게 음울한 하늘을 이고 신정치 일번지라는 어느 합동연설 회장에 간다. 입구는 물론 주변주택가까지 예쁘게 장식된 고급승용차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어 과연 신한국인들의 첨단생활 수준을 가늠케 했다. 그런만큼 이곳의 14대 선거에서의 선택은 당대의 관심을 끌고있다. 교양있고 학벌있고 생활수준이 높은 그들이 어떤 전망 혹은 방향성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그러나 연설회장에는 자발적 청중들의 모습이 매우 적어보였다. 「신정치 일번지 대격돌 예고」라는 신문제목이 무색할만큼 허전했는데,그래도 군중은 4천명쯤 이라니 조직적 동원력이 다들 굉장한가 보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이번 선거에 바람이 없다는데 사실일까 하고. 바람이란 무엇인가. 모여드는 인파와 그 인파의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진실에의 격정과 한가지라도 더 들으려는 갈증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런데 지금은 정보화 사회다. 모든 정보가 안방까지 시시각각 전달되고 분석되고 해석되어 머리와 귀에 정보과잉을 일으키고 있어서 죽을지경인데 누가 정보를 찾아 군중인파속에 쉽게 나오겠느냐고.

그래서 바람은 광장에 없나보다. 입구에서부터 정말 낯선 90년대적 풍경은 대학생 운동원들의 모습이다. 나에겐 아직도 대학생 하면 민족의 양심,민주의 횃불 같은 80년대적 순결한 이미지만 떠오르는데 이렇게 여야 전선 구분 없이 열심히 유료 선거운동을 해주는 모습을 보니 아,정말 「90년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이 「이것이냐,저것이냐」(Either or not)가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Both and)라더니 바로 그 공식을 현실에서 확인한 느낌이었다. 너무 싸게 노는 것은 아닐까. 그 순결한 이미지를 그렇게 싸게 팔아도 될까.

첫번째 등단한 야당후보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답게 『조국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나왔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먹을 것 있고 강연만 다녀도 편히 살 수 있는데 이 음산한 날씨에 내가 이게뭡니까?』라고 말하니까 청중이 와­웃는다. 「유권자가 표를 가지고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그의 변화당위론에는 공감하면서도 기존정치권의 물갈이를 위해 태어났다는 그 당의 물갈이론에는 누구나 의구심을 갖는 눈치다.

두번째로 나온 제1야당의 후보는 야권통합이 될때까지 정치활동을 중단했던 자신의 고독한 양심과 3당합당의 반민주성,정치적 부도덕성을 차근차근 비판한다. 그리고 여권이 주장하는 『안정의 의미가 무엇이냐. 정권의 안정인가,정권안보인가,국가의 안정인가』를 차근차근 따져보길 바란다고 하며 국가경제,증시 문제를 상세히 설명한다. 제1야당 후보의 연설인데도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저항성의 격정이나 진실을 부르짖는 사자후가 없다. 아니 80년대에 비해 내면화 되고 간접화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야성의 격정같은 것을 원했던 나 자신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80년대 병을 앓고있나 보다.

세번째로 여당 현역 국회의원이 나왔다.

그는 3당합당의 당위성과 그로 인해 민주화 시대가 온 것,지역에서 자신이 한 업적,앞으로 할 초현대식 공약들을 줄줄이 열창했는데 박력있는 목소리와 신념에 찬 몸짓이 꼭 꿈을 실천할 사람으로 「보이게」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렇게 지역일에 전폭적으로 몰두하려면 차라리 구의회에 나올 것을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바람도 없고 이슈도 없는 선거라고 한다. 그러나 심층을 들여다 보면 토지공개념의 유보,금융실명제 실종,3당합당에의 심판,전교조 문제,13대 마지막 국회에서의 날치기 통과 등 심판받을 문제는 너무 많고 우리의 시선은 더 날카로워져야 한다. 비록 누구나 한표지만 그래도 한표가 모여 판을 새로 짜는 것이다. 하드웨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소프트웨어가 많고 좋으면 뭘하나.

하드웨어가 고장나 있으면 그 많은 소프트웨어가 폐기처분 되는 것처럼 아무리 국민이 우수하고 하나하나가 정의롭고 진리를 추구한다 해도 우리를 대신해줄 대의원들의 모임인 정치판의 하드웨어가 고장나 있다면 우리의 꿈과 갈망은 통로를 못찾아 아무런 작동을 못하는 것이다. 바람도 없고 이슈도 없다면 돈과 조직이 말한다고 한다. 원래 바람은 눈에 안보이는 것이나 물체의 흔들림을 보고 우리는 거기에 바람이 있음을 안다. 바람은 「바람」이다. 아니,진정코 90년대의 우리에게는 꿈틀거리는 바람조차 없다는 말인가. 돈과 조직이 나대신 말을 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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