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판도 변화:상/은행소유 이병철 최고위치 반석에/삼호 정재호·개풍 이정림도 급부상/55년 최대기업 삼양사는 재계순위 뒷걸음질50년대를 지나면서 재계의 판도는 크게 변했다. 한사람이 여러 기업을 거느리는 이른바 재벌그룹이 출현했고 재계를 리드하는 주역들의 자리바꿈이 빈번해졌다. 시류의 흐름을 잘 탄 기업인은 60년대 재벌양산시대를 맞아 재계의 스타덤에 올라섰고 또 수많은 기업인들은 재계의 뒷전으로 물러 앉았다.
흔히 개항 이후부터 60년 이전까지를 국내 재벌형성의 제1기로 구분한다. 이 시기의 특징들을 점검해 보면 오늘을 주름잡고 있는 재벌들에 대한 보다 근접한 시각정립이 가능하다. 현재 국내 경제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기업들이 거의 모두 이 기간동안 틀을 갖췄고 61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한국경제의 개발과정에서 축재를 해왔다.
일제에 억눌려 장사꾼 이상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던 이 땅의 기업인들은 해방이후 일본이 버리고 간 적산기업을 불하받고 마카오와 홍콩무역 등을 통해 백지위에 한점 한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6·25는 다시 기업인들의 축재 기반을 파괴했고 자본축적의 기초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했다. 전쟁기간중 기업인들은 소비재 수입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작업이 시작되자 무역업에 나섰던 많은 기업인들이 소비재를 생산하는 제조업에 참여했다. 5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복구를 위한 미국의 원조가 본격화됐고 각종 산업이 시작됐다. 이러한 흐름을 거쳐 국내 기업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중에서 남보다 앞서 하나라도 더 따낸 기업인들은 재벌의 대열에 끼여들었다.
50년대까지 국내 기업인들의 자본축적과정은 한마디로 특혜의 연속이었다. 마카오와 홍콩무역시대의 수입할당과 수입허가,해방후 5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적산기업의 불하,원조자금과 물자의 선별배정,특혜적 저리융자,정부 및 미군건설공사의 독점 등이 50년대말 기업인들의 재산축적 목록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기업인 나름대로의 능력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기업경영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경영외적인 능력이 중요했다. 정부와 일부 기업인들이 손뼉을 맞추며 서로의 배를 불리고 있는 사이에 일반 국민들과 정부의 눈길을 받지못한 더 많은 기업인들이 소외됐다. 그때문에 재벌을 정경유착의 산물로 보게 됐고 국민들로부터 다소는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경제연감사의 55년도판 회사연감에는 자본금을 기준으로 한 10대 기업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위 삼양사(김연수),2위 대한석탄공사(임송본),3위 한국산업은행(구용서),4위 악희화학공업사(구인회),5위 금성방직(김성곤). 그 뒤로 전남방직·북삼화학공사·한국비료공사·현대건설·남익사 등이 올라 있고 대동공업·대한산업·서울수산시장·국안방직·대한방직·대한제분·제일제당·동방해상보험·대한조선공사·서울국제시장 등이 뒤를 이어 20대 기업을 형성하고 있었다.
55년 이후 60년까지 6년동안 그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60년에 삼성의 이병철과 삼호의 정재호,개풍 이정림 등이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대재벌로 부상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57년에 실시된 정부의 은행주불하에서 은행을 지배하게된 기업인들이다. 이들은 은행돈을 배경으로 많은 기업들을 인수하거나 새로운 회사들을 차려 60년에 이미 재벌로의 반석위에 올라앉은 것이다. 즉 은행주불하는 50년대말 국내 재계의 판도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흥업은행과 상업은행·조흥은행 등 3개 은행의 경영권을 갖고 있던 삼성의 이병철은 60년에 한일은행(흥업은행)과 삼성물산·제일제당·한국타이어·안국화재·근영물산·한국기계·풍국주정·조선양조·천일증권·동양방직·효성물산 등 12개 계열기업을 거느리고 있었다. 삼호그룹의 정재호도 불하받은 저축은행을 바탕으로(후에 제일은행으로 개편) 삼호무역·삼호방직·조선방직·대전방직·삼양흥업·제일화재를 계열사로 두었고 59년에 서울은행을 창업한 개풍의 이정림은 60년 대한양회·호양산업·배아산업·개풍상사·대한탄광·삼화제철·동방화재·대한철강 등 9개 기업을 거느리는 대재벌이 되었다.
삼성에 이어 재벌대열에 올라선 정재호가 사업에 참여한 것은 1950년. 양말공장을 하던 정재호는 6·25직전 대구에서 3천6백추 규모의 조그마한 면방직공장인 삼호방직을 설립했다. 6·25로 남한소재 대부분의 방직공장들이 올스톱하고 있을때 정재호의 삼호방직은 공전의 호황을 맞았다. 더욱이 정재호는 전쟁을 피해 대구와 부산으로 내려온 실력자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당시에 이기붕을 만났고 이기붕은 정재호를 재벌의 대열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힘이 됐다. 정재호는 삼호무역을 설립하여 무역업에 뛰어들었고 조선방직과 대전방직을 인수,복구하고 삼호방직을 확장해 일약 방직재벌로 부상했다. 또한 은행주불하에서는 이기붕의 도움으로 3위의 입찰가격에도 저축은행을 불하받았다.
개풍의 이정림은 49년 동향인 후배 이회림과 합작으로 개풍상사를 설립하면서 비즈니스 대열에 뛰어들었다. 53년 환도후에는 제빙공장과 탄광을 경영했고,56년 운크라(유엔 한국재건단) 자금으로 문경시멘트공장을 인수하여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그는 이어 59년 최태섭·이양구·박두병·김광균 등의 지원을 얻어 서울은행을 설립하고 50년대말 가장 비약적으로 성장한 기업인의 하나가 됐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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