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디를 가나 정치 이야기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도 여전히 화제는 정치뿐이다. 정치 계절에 어떤 지식인들은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히스테리컬해져서 「살인적」이란 표현까지 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그러는 또 한편에서는 선거 공휴일에 투표에는 기권하면서 일찌감치 여행 보따리를 쌀 궁리를 하는 탈정치적 허무주의자들도 제법 많다. 정치에 대한 과잉열정이나 냉소주의는 다같이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한국일보 2월27일자 석간 시사칼럼에 신명순 교수가 『정치 학자들 밥줄 떨어질까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정치학 전공아닌 연극인,소설가,종교인 등이 일가견을 가지고 정치인을 꾸짖고 정치를 매도한다』고 우려를 하였는데 정치학 전공아닌 지성인들의 정치에 대한 지상 참여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 허무주의가 만연되는 것을 막는데 한몫을 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정치가 모든 국민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가 모든 가치와 힘을 독점했던 특수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한국일보 2월20일자 석간에 실린 신윤환 교수의 「우리 모두 총선에서 기권합시다」라는 기권적 참여론을 읽고 참여의식이 강한 사람들조차 일단 후련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노정권의 통치력에는 시행착오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대통령의 공적은 무엇보다 언론 통제를 풀어서 나같은 작가도 그간 여기 저기 시론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언로를 열어준 민주화의 공적이다.
신명순 교수는 또 아무런 법적 근거없이 두번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내년으로 미룬 것을 비민주적이라고 하였지만 국가가 비상사태에 직면하면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결단을 내리는 포고령이 있듯이 지금 경제 비상사태에 있는 우리로서는 경제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린 결단으로 이를 환영하는 의견들도 있다. 이런 의견이 있는가 하면 저런 의견이 있는 것이 바로 민주정치의 실체가 아닐까.
칼 포퍼는 개방된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앞에 스스로를 개방하고,닫힌 사회에서는 조지 오웰적인 반유토피아를 창출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정치학과 정치감각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통치자가 정치학을 모르고도 정치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87년의 6월 민주항쟁때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일반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라면서 4·13호헌조치를 찬성하는 글을 써서 5공에 아부했던 어느 교수부부의 경우는 정치감각도 없으면서 닫힌 사회를 주장했던 예다.
토플러는 지식이 최고급의 권력을 낳는다고 말하였다. 하나 체제가 불안할수록 우연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정치가 결코 이론이나 지식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토플러는 또한 권력 수단의 과잉집중도 위험하지만 과소집중도 위험하다면서 레바논을 그 예로 들었다. 정치란 바로 이 균형을 유지하는 고도의 예술이 아닌가.
정치가 대중에 기반을 두었지만 정치인과 코미디언이 동일시된다든가,정치가 코미디와 종이한장 차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정치인이란 밑바닥까지 다들여다 보이게 해서도 역효과인가. 때로 고도의 카리스마적 작전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인가.
이쯤되면 「정치가 뭐길래」가 아니라 「무엇」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를 비생산적 소모전이라고 냉소하면서 기권하는 표가 많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가 벌써부터 높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은 문학에서나 가능한 말이고,정치에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것이 함축성이 있는 말임을 후보들이 음미할줄 안다면 이번 선거가 대권선거까지 볼만한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소소한 개인 여론의 집대성이 좌우한다는 것을 명심하기만 한다면,그들이 작은 일들을 너무 소홀히 다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만 않는다면,우리는 싫어도 다시 한표를 던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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