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산업주력 소비재국산화 선도/46년 「럭키크림」제조 도약발판 마련/빗·치약등 연속히트 재계전면 등장/59년엔 국산라디오생산 국내 전자산업 개척도삼성의 이병철과 함께 50년대 국내 재계사에 떠오른 또 다른 별 하나가 있었다. 낙희화학공업의 구인회다. 그는 이병철과 달리 결코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게 서서히 재계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사업에 나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역업에 열을 올리고 있을때 그는 조용히 제조업에 몰두했으며 시류와는 무관하게 지냈다. 50년대 정치와 재계에 일던 바람은 구인회의 본거지인 부산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구인회가 벌이는 사업들은 하나같이 히트했다. 일제 아마쓰 구리무가 판을 치고 있을때 구인회의 낙희크림이 이를 몰아냈고 홍콩제 빗과 미제 콜게이트치약도 그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급기야 59년 국내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라디오를 이 땅에 내놓아 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을 열었다.
구인회가 본격적인 사업에 나선 것은 광복 이후였다. 광복을 맞자 그는 고향인 진주에서 포목상인 구인상회를 청산하고 본거지를 부산으로 옮겼다. 구인상회는 진주에서는 제일가던 포목상점이었고 구인회는 많은 돈도 벌었다. 광복이 되면서 그의 꿈은 더욱 커졌다.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그가 맨 처음 차린 것은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였다.
구인회는 조선흥업사를 미군정청의 무역업허가 1호업체로 등록했다. 당시의 유행이던 무역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대마도의 목탄을 수입해 팔 계획이었으나 풍랑을 만나 고생만 하고 제대로 장사를 하지도 못했다. 그는 또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에 손을 대고 다시금 포목업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광복이 되자 사업이 잘 되기는 커녕 계속 시련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구인회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화장품인 구리무의 판매업에 뛰어든 것이다. 46년 봄이었다. 그의 사업동지는 동생인 철회와 정회,그리고 철회의 사위인 허준구였다. 정회는 크림 5백타스를 싣고 서울로 떠났다. 당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태회와 평회는 난데없는 크림을 보고 걱정했지만 가을부터는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구인회는 크림을 팔지만 말고 직접 만들어볼 계획을 세웠다. 경남 고성과 진주에 있던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3백만원이라는 돈을 마련했다.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47년 1월,드디어 럭키라는 상표를 단 크림이 생산됐다. 크림은 불티나게 팔렸다. 아마쓰구리무 한타스에 5백원이었지만 럭키크림은 천원에도 구할 수 없었다. 럭키크림은 구인회에게 행운을 가져다줬고 상업과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화장품사업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자 49년에는 교편을 잡고 있던 장남 자경이 합류,숙부인 태회와 함께 서울에 화장품연구소를 차렸다. 구인회는 불과 3,4년 사이에 10배나 되는 수익을 올렸다.
그런데 엉뚱한데서 문제가 생겼다. 크림이 문제가 아니라 뚜껑이 문제였다. 크림뚜껑이 잘 깨진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구인회는 즉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제품과 같은 플라스틱 뚜껑의 생산을 계획했다. 낙희화학이 플라스틱공업을 여는 계기였다. 6·25가 터져 모두들 움츠렸으나 구인회는 화장품에서 번돈 3억원을 몽땅 플라스틱에 쏟아넣었다. 1951년이다. 그때 부산에 내려온 삼성물산의 이병철이 2억원을 댈테니 원당수입을 하자고 제의했으나 구인회의 생각은 오로지 플라스틱이었다.
1952년 9월 플라스틱사출기가 부산항에 도착했고 곧 기계가 설치됐다. 전압이 낮아 시동이 걸리지 않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드디어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리엔탈. 낙희가 개발한 플라스틱 제품 1호인 빗의 상표였다. 이역시 불티났다. 시장은 곧 낙희의 것이었다. 비누곽도 생산했다. 화장품뚜껑이 깨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구인회는 화장품과 플라스틱을 정신없이 생산했다. 제품도 세숫대야 식기 칫솔 등으로 넓혀 나갔다. 53년 봄. 서울로 신도가 시작되자 구인회는 태회를 서울 책임자로 보내고 허준구의 동생인 진구를 합류시켰다. 판매망이 부산에서 전국으로 넓어졌다. 이제는 크림보다는 플라스틱이었다.
55년에는 치약을 생산했다. 일부층만 미제 콜게이트치약을 사용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소금으로 이를 닦고 있을 즈음에 나온 낙희치약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였다. 곧 미제 콜게이트를 밀어 냈고 구인회를 재벌의 반석위로 밀어올렸다. 대한경제연감에는 1955년도 자본금을 기준으로 한 10대기업중 구인회의 낙희화학을 4위로 기록하고 있다.
56년 평회의 친구로 운크라에 근무하고 있더 박승찬이 합류했다. 박승찬 상무는 구인회에게 윤욱현을 소개했고 그는 곧 낙희화학 기획부장으로 영입됐다. 윤욱현은 후일 낙희와 구인회를 재계의 선두자리로 밀어넣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전문경영인이었다. 57년에는 홍종우등 7명이 공개채용됐고 이헌조도 이대 낙희에 참가,낙희의 전문경영인시대를 열었다.
미국의 원조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연계자금사건과 은행불하 등으로 어지럽던 50년대말,낙희의 구인회는 화장품과 플라스틱 치약 칫솔 등에 묻혀 세상의 번거로움을 잊은채 한발짝 한발짝 재계의 앞자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구인회가 재계 전면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는 계기는 59년 11월 국내 최초의 라디오인 A501이 생산되면서부터다. 낙희의 기획부장 윤욱현의 치밀한 사전조사와 구인회의 결단이 가져온 라디오 공업은 소비재에만 치중됐던 국내 산업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삼성과 럭키금성이라는 두개의 큰 별이 이땅의 재벌 양대산맥을 형성하며 오늘날까지 국내 재계를 선도하고 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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