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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냐…미국인이냐…“설땅이 없다”(조기유학 이대로 좋은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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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냐…미국인이냐…“설땅이 없다”(조기유학 이대로 좋은가:15)

입력
1992.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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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겪으며 정체성에 갈등/귀국해도 친구와 괴리감만 확인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가,철저하게 미국사람이 돼야 하는가. 돌아가야 하는가,머물러야 하는가.

조기유학생들이 가장 심각하게 겪는 갈등이다. 미국에 온지 2∼3년이 대부분인 이들은 점차 미국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되고 장래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에 부딪치게 된다.

당연히 미국에 생활의 뿌리를 내려야 할 이민자녀도 아니고,대학을 졸업한 뒤 학문적 목표에 따라 한시적으로 와있는 성인유학생들도 아닌 이들로선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갈등이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모고교로 유학온지 2년된 P모군(17)은 『처음엔 교포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같아 마주치기조차 싫었다. 그러나 나도 이제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간다』고 말했다. P군은 『여기에 있으려니,미국생활·문화에 하루빨리 적응하려하니 어쩔 수 없다』고 자기변호를 했다.

P군은 어쩌다 한국에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도 별로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영어를 섞어쓰거나 어깨를 들썩이는 미국식 몸짓을 하다가 놀림을 당할 뿐 미국생활을 들려줘봤자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는다. 요즘 한창 입에 올리는 유행어도 몰라 대화에 끼이기가 어렵다.

P군은 『나이가 들더라도 한국친구들과는 진지한 얘기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뜻 대답하면서도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는 알 수 없다』고 토를 달았다.

뉴욕 인근 S고교의 K모군(18)은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가수왕은 누가 되었느냐」「통일은 될 것 같으냐」고 묻지만 아무래도 한국사정을 잘 몰라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K군은 미국까지 가서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도 한국사람인데…」하는 생각 때문에 알고 싶다는 것이다.

K군은 2년여의 짧은 미국생활이지만 미국 친구들을 깊게 사귀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백인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어서 베풀 줄 알고 고마움도 아는 흑인아이들이 더 좋단다.

K군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여기 대학졸업장을 제대로 인정해 줄 것인지,도피유학이니 해서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미국에 온지 1년된 C군(16)은 『한국에서는 제대로 할 수 없는 디자인을 공부해 돌아가 반드시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다부진 의욕을 밝혔다. 어릴 때 3년간 미국에서 산 경험이 있는 C군은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C군은 『대부분의 친구들이 미국에 남으려 한다』고 말했다. 출신학교를 유별나게 따지는 한국사회에서 미국대학을 나와 친구도 하나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학생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필라델피아에 있는 A군(18)의 방향은 확실하다. A군은 영어를 하는 사람이 너무나 부러워보여 3년전 미국에 왔다. 어머니는 점을 쳐본뒤 『미국에 가면 성공한다. 미국에서 살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유학을 주선했다.

A군은 의식적으로 한국유학생들과 안 어울리며 한글책도 전혀 읽지 않는다. 벌써 우리말이 서투르게 된 A군은 『한국의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미국에 온 이상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살아야 하며 미국사회에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생각과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교포 사회에서는 『젊은 2·3세들이 설 땅이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동양적 전통의 가정과 미국적 가치의 교육제도라는 이중구조속에서 커온 이들이 겪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사회 적응의 어려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국교육을 받고 자란 교포자녀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대부분 미국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미국사회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인종차별,의식의 괴리를 절감하고 교포사회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이미 부모들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조기유학붐이 본격적으로 일어난지 몇년 되지 않으므로 유학생들이 장래가 어떤 모습일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교포자녀들의 처지를 통해 조기유학생들의 앞날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 교포는 『미국생활은 5년이 고비다. 그 정도 지나면 돌아가려했던 학생들도 어쩔 수 없이 주저앉게 된다』고 말한다.

과연 우리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미국에서 자리잡고 영원히 살기를 기대하며 유학을 보냈을까. 그들이 한국을 떠나게 만든 것도 우리의 책임이지만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일 수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우리사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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