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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모 26년… 120여차례 “생이별”(화제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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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모 26년… 120여차례 “생이별”(화제추적)

입력
1992.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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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트아동복지회 자원봉사자 정순례씨/우리사회 편견심해… 대부분 해외입양/뿌린 씨앗 못거두는 현실 “답답”아직도 매년 수천명의 어린 생명들이 무책임하게 길에 버려진다. 대부분 미혼모의 소생이거나 심신장애아라는 죄아닌 죄를 운명적으로 안고 태어난 아이들이다.

홀트아동복지회에는 현재도 수백명의 아기들이 등록돼 경매상품처럼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어지기를 기다린다. 입양이 확정될 때까지 이 버림받은 아이들은 복지회의 의뢰를 받은 「임시엄마」들 손에서 길러진다. 홀트아동복지회에는 3백여명의 자원 「위탁모」들이 아기들을 집에 데려다 이별이 전제된 시한부 사랑을 쏟고있다. 이들 대부분은 자식이 장성해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년의 주부들이다.

정순례씨(63·여·서울 마포구 도화동)는 경력 26년째에 이르는 최고참 위탁모이다. 지난 66년 막내아들을 국민학교에 입학시킨뒤 이웃친구의 권유로 적적함을 달래고 보람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홀트아동복지회의 위탁모로 등록했던 정씨는 1백20여차례에 이르는 이별로 가슴이 멍들대로 멍들었다.

이별의 쓰라림을 잊기위해 또 아기를 데려다 키우고 그로인해 또 가슴아파 해야 하는 「악순환」을 견디다보니 이제 아기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4년까지,한꺼번에 3명의 갓난아기를 돌보기도 했던 지난 세월은 그래서 기쁨보다는 눈물이 많았던 나날들이었다.

정씨가 처음으로 맡아 기르게 된 아기는 「김금영」이라는 생후 1개월된 여아였다. 어느 20대 미혼모가 버린 아기란 사실 외에 정씨가 아는바는 없다.

약5개월을 맡아키운 정씨는 그해 9월 금영이가 미국으로 입양이 결정되자 차라리 자신이 이애를 맡아키울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백일잔치까지 남부럽지 않게 차려주고 장난감과 옷가지들도 아낌없이 사주면서 정성을 쏟았던 금영이를 금포공항까지 나가 입양호송원에게 넘겨주는 순간 정씨는 혈육의 정을 끊어내는 듯한 고통에 울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을 자신이 없다』고 몇번씩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으나 금영이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고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본 다른 젖먹이들의 안쓰러운 모습이 떠나지 않아 1개월도 못돼 다시 아기를 받았다.

금영이와 함께 얼굴만 떠올려도 눈물이 나는 아이는 혼혈아기 「정현숙」이다.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15년전만 해도 혼혈고아의 수는 적지않았다. 일반고아들은 종종 국내로 입양돼 친자입적까지 마치고 뒤늦게 나마 정상적인 성장의 기회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혼혈아들은 우선 외모와 그 출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 때문에 국내입양은 커녕 고아원 같은 수용시설에서조차 친구들과의 적응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 동두천부근 기지촌에서 흑인 미군병사를 아버지로 해서 태어난 현숙이는 아버지가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저버리는 바람에 입양기관까지 흘러들어왔다. 75년 5월 정씨에게 위탁될 당시 두돌이 갓 지났던 현숙이는 혼자서는 걸을수조차 없는 소아마비였다. 「장애인 혼혈고아」라는 최악의 조건을 타고난 이 아이는 입양전망이 희박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결국 5개월여만에 경기 일산에 있는 고아보호 시설로 넘겨졌다.

현숙이를 키우는 동안 정씨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많았다고 한다. 위탁모란 사실을 모르는 이웃들은 정씨의 과거를 쑤군거리며 의심하기도 했고 아이를 업고 시장에라도 나가면 묘한 눈총 때문에 볼일도 채 못마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일산의 보호시설로 넘겨진 뒤에도 정씨는 매주 남편 김현태씨(71)와 함께 현숙이를 만나러 갔다. 비교적 좋은 시설에서 자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숙이는 『엄마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떨어지려 하지 않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은 늘 눈물에 얼굴이 뒤범벅 되었다고 했다.

결국 몇년뒤 현숙이는 미국으로 입양됐지만,『해외 입양만이 최선의 길일 수밖에 없었던 현숙이의 운명을 생각하면 아무리 내나라,내땅이지만 원망스러움을 씻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국내여행 한번 제대로 하지못했던 정씨는 지난 89년 난생 처음 미국여행을 했다. 장기위탁모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홀트아동복지회가 마련한 해외위탁시설 견학이었다. 열흘간 미국의 각도시를 돌며 고아원,위탁시설,장애인 재활센터 등을 둘러본 정씨는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일에 관한한 미국은 정말 부러운 나라였다』고 말한다. 한국의 최대 「고아수출 대상국」인 미국에 미혼모·고아·장애인이 우리보다 더 많은데 놀랐던 정씨는 발달된 국내 입양체계와 완벽한 사회보장제도,그리고 장애아나 혼혈아 등에 대한 편견없는 사회분위기 등을 보면서,또 한번 놀라고 부러웠다.

미국여행중 정씨는 86년 자신이 키우다가 미국으로 입양보낸 「오정미」란 아이를 현지 홀트회의 주선으로 만났다. 이 아이는 입양 당시 정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갔기 때문에,정씨를 자신의 친모라고 믿고 있었다. 사진을 통해 낯익은 정씨를 공항에서 먼저 알아보고 『마마』라고 부르며 품에 안기는 정미를 만나는 순간,수십년전 헤어졌던 혈육을 상봉하는 듯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과연 나를 생모로 믿는 이 아이에게 미국으로 보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라는 당혹스러움이 미국 여행기간중 내내 정씨를 짓눌렀다.

정미는 아직까지도 「친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

지금까지 정씨가 맡아온 1백20여명의 아이중 국내 입양된 경우는 10여명 남짓하다. 장애아동과 혼혈 등 국내입양이 어려운 아이들을 비교적 많이 길러온 탓도 있겠지만,그래도 정씨는 기왕이면 이땅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친부모로 믿고 자랄 수 있는 한국사람 손에서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양을 부끄러운 일인양 비밀리에 진행하고,남의 자식 키우는 것을 조상들께 못할짓 하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아직 기대하기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결코 쉽지않은 위탁모 노릇에 반평생을 바친 정씨는 그다지 넉넉지 않은 살림과 주변의 눈총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말없이 도와준 남편과 3남1녀의 자녀들을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현재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막내아들(34)과 함께 살고있는 정씨는 이제는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자녀들은 이제 위탁모일 그만하고 여행이나 다니면서 쉬라고 권하지만 정씨는 『어린생명 키우는 것도 공덕』이라며 단호히 거절한다.

요즘 3개월된 설진희양을 업어 키우는 정씨의 등은 유난히 굽어있다. 정씨는 이 이유를 『아기의 체중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려있는 고통의 무게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정씨는 매달 한번은 빠지지 않고 동네 절에 가 아이들을 위해 업장소멸의 불공을 드린다.

여느해와 같이 올 사월초파일에도 1백20여명 자식들의 이름을 올린 연등을 밝힐 계획이라는 정씨는 이제 2년밖에 남지않은 위탁모 정년을 앞두고 자주 『내가 죽으면 이 불쌍한 어린 것들을 위해 누가 촛불이라도 켜줄까』를 생각하며 쓸쓸해 한다.<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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