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주 불하 특혜/삼성 이병철 3개 시은주 절반소유/이기붕 배경 정재호는 저축은 차지/기업인들 “힘있는 뒷줄잡자”정치자금 물쓰듯50년대말 재계의 판도를 뒤흔든 또 한차례의 사건은 정부가 갖고있던 은행주의 불하였다. 정권과 재벌의 결탁은 이 과정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금융의 민주화를 위해 금융기관의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것이 정부가 내건 은행주 불하의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자유당 정부가 친여 재벌들로 하여금 은행을 주축으로 한 근대적인 콘체른을 형성하도록 한뒤 영구집권을 뒷받침 하는 세력기반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은행주 불하가 시작된 것은 54년 11월. 은행주 불하에 참여한 기업인들은 삼성의 이병철,삼호방직 정재호,대한산업 설경동,조선제분 윤석준,대한제분 이한원,합동증권의 진영득,조선맥주의 민덕기,조선방직의 강일매,대한시멘트의 이정림 등으로 당시의 재벌들이 총망라됐다.
그러나 54년에 실시된 공매는 유찰됐다. 입찰주식의 가격이 비싸고 주식의 양도방법이 까다롭다는 이유였다. 그 후에도 입찰은 여섯차례나 반복됐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은행주의 민간불하가 이처럼 공전을 거듭하자 55년 7월 정부는 불하방식을 분할공매 방식으로 전환하고 입찰 계좌수의 제한을 철폐하는 한편 소수 독점주주가 지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공매가 본격화 된 것은 57년 8월이었다. 조흥은행,상업은행,저축은행,흥업은행 등 4개 시중은행의 공매입찰이 은행별로 실시됐다.
한일은행의 전신인 흥업은행의 입찰에는 이병철과 설경동 윤석준 정재호 등 18명이 참찰했다. 삼성의 이병철은 주당 2천8백66환으로 36만3천5백주를 응차랬다. 개찰결과 이병철의 응찰가격은 3위. 흥업은행은 따라서 최고가를 써놓은 입찰자에게 불하돼야 마땅했으나 정부는 『시중은행 주식을 대량 매각할 방침이어서 실력있는 기업인이 불하받아야 한다』면서 1,2위를 제쳐두고 3위였던 이병철이 인수하도록 했다.
『나를 포함한 18명의 응찰자중에는 주당 4천4백환의 최고가를 비롯하여 3천3백환으로 입찰한 사람이 있어 나의 응찰가격은 3위였다. 그러나 1위와 2위 응찰자의 주수는 불과 50주와 1백주였다. 다른 응찰자에 대한 짓궂은 행동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주가 분산되면 금융시장의 정비를 기할 수 없었으므로 묶어서 불하하려는 것이 정부의 의도인 것 같았다. 입찰가격 2위인 주당 3천3백환으로 사주기를 바란다는 정부의 요청이 있어 낙찰에서 빠진 잔여주까지 합해서 전부 그 가격으로 사들이게 됐다. 총액 11억9천만환 상당의 규모였다. 이리하여 흥업은행주의 83%를 가진 대주주가 됐다』 이병철의 주장이다.
현 제일은행의 전신인 저축은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저축은행의 입찰에는 정재호와 설경동 강일매 윤석준 등이 참가했으나 입찰가격 3위인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넘어갔다. 조흥은행은 일제말 은행통합 이전의 옛 한일은행계 민영휘의 증손인 조선맥주의 민덕기와 대구은행계 정재학의 후손인 정운용,정종원 등이 대주주로 남아있었는데 은행불하가 시작되자 이들이 입찰에 참여했다. 이들중 최대주주인 민덕기가 최고가격으로 응찰했으나 최대주주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흥업은행과 저축은행에 입찰했다가 떨어진 윤석준이 민씨의 주식을 인수하고 경영권을 장악해 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가 의중에 두고있던 사람은 이병철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병철은 얼마후 조흥은행의 주식 55%를 매입했고 윤석준은 은행불하중 괜히 헛돈만 쓰고 몰락의 길에 빠지고 말았다. 은행불하를 둘러싸고 힘있는 뒷줄을 잡기위해 정치자금을 물쓰듯 했던 것이다.
은행 불하과정은 누가 얼마나 힘있는 정치권과 줄을 대고 있느냐였다. 특히 저축은행 입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당시에는 쟁쟁하던 배경을 등에 업어 입찰과정은 마치 정치세력의 각축장 같았다. 삼호방직의 정재호는 서대문 경무대로 통하던 이기붕과 밀착돼 있었고 대한방직의 설경동은 자유당의 재정부장을 지낸바 있고 조선방직의 강일매도 경무대의 이대통령과 연분이 있어 피차 막상막하의 힘을 뒤에 업고 있었다. 윤석준의 힘도 만만치는 않았다. 은행불하가 시작된 시기의 재무부장관인 김현철과 밀착돼 있었으나 최종 입찰이 있던 시기에는 재무부장관이 인태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인태식 당시 재무부장관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입찰과정에서 최고가로 입찰한 사람을 제쳐두고 다른사람에게 낙찰시켰다 해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조흥은행의 민씨는 조선맥주 하나만으로도 경영에 힘겨운 상황이었고 저축은행의 윤씨는 조선제분 이라는 귀속재산을 안고있는 처지여서 한 개인이 두개 이상의 귀속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당시의 법규정에 사실상 위배되고 있었다』
은행불하중 가장 활발했던 것은 삼성의 이병철이었다. 3위의 입찰가로 흥업은행을 소유했고 우여곡절 끝에 조흥은행의 최대주주가 된데다 나중에는 상업은행의 대주주가 됐다. 상업은행은 당초 합동증권의 진영득을 명의인으로 등장시킨 이한원이 최대주주였으나 흥업은행의 지분이 33%나 돼 자연스럽게 흥업은행의 최대주주인 이병철이 상업은행의 경영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이병철은 3개 시중은행주의 거의 절반을 소유했다.
국내 최대의 재벌로 반세기 국내 재계사를 리드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삼성이 본격적인 재벌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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