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계 기업인에 은행융자 특혜/동립산업·중앙산업등 12개사 연루/대출금중 일정액은 선거자금 바쳐/태창 백낙승 최대수혜자… 야당서 정치문제화정치와 돈,정권과 재벌은 길지않은 우리 재계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비리의 온상이다. 정치는 돈을 먹고 재벌은 정권을 등에업고 몸을 불리면서 온갖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고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바뀌면서 기업들이 재벌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50년대 말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58년 7월. 국회는 정권과 재벌의 함수관계를 풀려는 야당의원과 이를 해명하는 정부간에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야당지난 2월부터 4월사이에 도합 39억7천만환이나 되는 자금을 대출한 것은 선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정부는 자금의 방출내역을 밝히시오.
▲정부대한중공업에 4억6천8백만환,금성방직에 2억,태창방직에 1억,조폐공사 2억,동양시멘트 1억5천,조선방직 1억5천,중앙산업 6억7천,삼호방직 2억,동립산업 7억,동양사료 5억,국제보도연맹 2천,수도영화사 2억,합계 35억5천8백만환입니다. 이 자금은 지난해 산업은행 업무에 들어있던 것으로 업체의 운영 및 시설자금 등을 충분히 검토한 후 결정한 것입니다.
▲야당계란 쇠고기 영화제작 건빵 따위의 제조가 기간산업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소.
▲정부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주게되고 계란과 쇠고기를 군납하는 것도 달러획득에 필요한 기간산업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당그 따위 잠꼬대같은 소리 집어치우시오.
정부의 답변자는 김현철 재무부장관과 산업은행 총재 구용서였다.
김현철의 회고. 『국회출입 기자들과 대출해간 업체의 대표들이 거의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재경위는 웅성거렸고 조기잡이 때를 맞이한 서해안 어느 작은 포구의 파시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야당의 질문공세는 계속됐고 산업은행의 대출이 대부분 정치자금으로 유입됐다면서 집요하게 추궁했다. 급기야 나와 한은,산은총재에 대한 불신임안이 제기됐고 여야의원들은 서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격투직전의 양상을 벌였다』
연계자금을 놓고 벌어진 사건이었다. 연계자금이란 한마디로 한국은행의 돈을 산업은행이 지명하는 기업에게 대출된 자금이다. 과정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우선 산업재건에 필요한 자금의 대출창구였던 산업은행은 재무부의 승인을 얻어 융자순위를 결정한다. 다음 마련된 융자순위에 따라 한국은행에 대해 산업은행 이름으로 지불보증을 한다. 그리고 산업은행 지불보증을 근거로 시중은행이 한국은행에서 재할인을 받게 한 다음 산업은행 관리계정에 넣어 해당업체에 융자케한다. 결국 돈이 한은금고에서 나와 업자의 손에 넘어갈 때까지 산업은행은 한푼의 돈도 만지지 않으면서 원하는 기업에게 대출해 주게 된다.
이렇게 조달된 돈은 50년 중반부터 자유당계 기업인에게 넘어갔다. 이 돈은 58년 5·2 국회의원 선거가 가까워 오면서 더욱 과감하게 대출됐다. 대출받은 기업인들은 일정한 금액을 자유당의 선거자금으로 바쳤다. 야당이 문제삼은 연계자금은 이런 과정을 거쳐 대출되었다.
해방후 정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절에 이승만에게 매달 생활비를 대주고 대통령 당선후에는 약식을 만들어 경무대를 드나들었던 태창재벌의 백낙승은 가장 많은 연계자금 특혜를 받고 날로 세를 넓혔다. 조선제분의 윤석준과 동립산업 함창희도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금성방직과 동앙시멘트도 연계자금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야당의 조사보고서. 1,연계자금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산업은행의 각서 한장으로 시중은행을 통해 방출됐고 2,금통위의 의결서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산은 증자를 한 다음 금융채권을 발행하고 연계자금 대출액을 연내로 시중은행에 상환토록 돼 있다 3,금통위의 일부 위원들은 강경하게 반대하고 퇴장했으나 어거지로 승인시키도록 했고 4,융자업체의 담보물이 확실치 않은 점으로 미루어 산은 자금대출은 명백히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꾸며낸 게획적인 부당 대출사건이다. 야당은 연계자금을 받은 업자들이 5·2선거를 위해 10억환 가량을 자유당에 바쳤다고 주장했다.
부산정치파동 때 중석불사건이 터졌고 5·2선거에서 연계자금사건이 터진 것이다. 자유당 정부는 이밖에 4사5입 개헌,3·15 부정선거 등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외환·금융·세제·공사입찰 등을 바탕으로 자금을 마련했다. 물론 기업인들은 정부의 특혜를 받는 대신 일정금액을 정권에 바치고 이익을 봤다.
유명한 3백파동은 생산수율과 원가를 낮게 지정해 주거나 수입품에 대해 보호관세를 매기는 등 세제를 악용해 부당이득을 취하게 한 뒤 업자와 정권이 배를 불린 사건이다. 당시 설탕과 섬유,밀가루 생산에 참여했던 모든 기업이 이같은 정경유착으로 부를 쌓고 있었다.
자유당의 정치자금 소스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건설산업이다. 공사가격의 30%는 미리 공제되어 자유당 정치자금으로 납부되고 20%는 이익금으로 분배한후 나머지 50%만 가지고 공사했다는 말까지 있었다. 건설업계 5인조가 자유당 5인조로 불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벌은 정치자금 제공을 이권을 위한 교제비 정도로 간주하고 정권은 경제운용을 정치자금 활용을 위한 방편쯤으로 활용하던 이같은 일들은 과연 아주 먼 옛날의 일이었던가.<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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