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간 외쳐온 「혁명」은 없고/어디건 숨막히는 “승리·투쟁”/“쌀밥·고깃국” 다짐 김 부자에 맹목적 충성 일색판문점을 지나 북한에 가는 사람들은 역사속으로,해방과 분단과 6·25속으로,그 피비린내와 증오와 함성속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을 하게된다. 산과 농토와 학교와 건물에 널려있는 붉은 글씨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총진군하자/생산도 학습도 새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모두다 영웅적으로 살며 투쟁하자/자력경생·전격전·속도전/위대한 주체사상 만세!/사회주의 공업강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착취없고 억압없는 사회주의 만세!…
이 표어들은 이땅이 일제의 수탈과 자본주의와의 대결과 6·25의 참화를 극복하고 건설한 「혁명전사들의 나라」임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그 혁명적인 구호들을 빰치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 부자에게 대를 이어 바치는 충성의 표어들이다. 2월16일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거국적으로 치른 평양시내 곳곳에는 「경축 2·16,만수축원」이 흘러 넘치고 있다. 표어들은 계속 다짐하고 있다.
당과 수령을 충성과 효성을 다하자/위대한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 만세!/인민군 총사령관 김정일동지께 최대의 영광을 드립니다….
김일성대학에는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이 영도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을 걸고 사수하자」는 결사적 맹세가 붙어있고 인민학교(국민학교)들은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는 감사인사를 내걸고 있다.
숨막히는 구호의 나라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그들의 역사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분노가 솟았다. 인민공화국을 건설한지 44년,적화통일을 하겠다고 남침을 감행했던 6·25전쟁후 42년,항일유격대 식으로 생산하고 학습하고 생활하며 그들이 이룬나라는 결국 어떤 나라인가.
성공한적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는 이 끝없는 혁명을 위해 인민들은 얼마나 더 영웅적인 투쟁을 강요받아야 할까. 세상물정 모르는 80세의 수령과 그 아들은 인민들이 얼마나 더 충성을 맹세해야 안심할까.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보통사람의 행복을 누릴 날이 오기는 올까.
48년 9월 김일성은 평양의 군중대회에서 『…우리 인민은 이제부터 자기의 정부를 가진 당당한 민족으로서 항상 정부의 옹호를 받을 것이며 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위신과 권리와 영예를 가지게될 것입니다. …창건된 우리 공화국의 전도는 양양하며 우리민족 앞에는 승리의 광활한 대로가 열려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그가 혁명에의 헌신을 강요하는 구호로 인민을 채찍일 하며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국가를 통치해온지 44년만에 내놓은 교시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다. 92년 1월1일 신년사에서 그는 『휜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인민의 세기적 염원은 가까운 기간에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라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기자」 완장을 두른 한 남자와 나는 인문문화궁전에서 얘기를 나눴다.
『당신들에게 구호가 필요했던 역사를 나는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더 싸워야 혁명이 완수될 것인가』
『우리 사회주의는 역사가 짧으니 자본주의보다 못사는게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태해지지 않게 자기를 통제하며 더 싸워야 한다. 싸운다는 말을 호전적으로 이해하지 말라』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북한만이 사회주의를 붙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사회주의와 우리의 사회주의는 다르다. 위대한 수령께서는 일찍이 주체사상에 의한 우리식 사회주의를 해오셨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다 무너져도 우리는 끄덕없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포기한 나라들은 다 거러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손을 내밀고 있다. 소련을 보라. 고르바초프가 결국 나라를 들어먹지 않았는가』
『김일성주석은 인민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세기적 염원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더 싸우면 그날이 올 것 같은가』
『그말은 상징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런것을 지금 못먹는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외신들은 그동안 고위급회담 남측 대표단이 평양에 갈때마다 그 주변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모두 동원된 사람들이라고 보도해왔다. 선택된 사람들만 살고 있어 불구자 한사람 찾아볼 수 없다는 평양,동원되었든 동원되지 않았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검고 마르고 초췌하고 표정이 없었다.
안에 겹겹이 옷을 입은듯 그들의 코트나 잠바는 모두 몸에 꼭 끼었고 여자들은 사각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에는 깃발과 구호로 가릴 수 없는 찌들린 고단함이 배어 있었었다.
아침 7시30분에 출근하고 하오 두세시에 퇴근하는 인민들은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자야한다. 낮에도 텅빈 거리가 저녁이 되면 인적이 끊겨 죽은 도시 같다. 초저녁 잠이 깊이든 도시에 네온으로 빛나는 구호들만 깨어 계속 외치고 있다.
구호에서 비로소 해방된 인민들은 어떤 얼굴로 잠들어 있을까. 그들은 잠자며 어떤 꿈을 꿀까.
베르사유 궁전이 무색한 화려한 연회장 목란관에서 연형묵총리가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 이상한 도시에 김일성 주석을 존경한다는 남한의 젊음이들을 데려오고 싶었다. 구호들만 깨어 반짝이는 이 이상한 밤에 44년간 외쳐온 그 목쉰 소리를 함께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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