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 구별해야”/시기나 제도상 달라 별도의 대응을/일은 「결자해지」 바탕 해결책 스스로 제시토록최근 우리나라에서 클로스업되고 있는 여자정신대와 종군위안부의 문제는 전후 일찍이 일본정부에 의해서 해결되어야할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아직도 그 진상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음으로써,낡은 문제가 새삼 새롭게 제기된 것이다. 필자는,이 기회를 빌려서 자칫하면 역사의 망각속에 묻혀버리고 말뻔했던 이 문제를 현실의 살아있는 문제로 되살려놓은 한국정신대 대책협의회 등의 유관단체들과 언론각사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오늘 굳이 펜을 들게된 것은,이 문제들의 진상을 밝히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또 여자정신대와 종군위안부가 서로 관련이 되는 부분도 있었으나 본래 같은 범주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게 되면,그것은 사실오인이 될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본래 일본정부에 의하여 비 혹은 극비의 사항으로 취급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자료의 은폐·인멸 등으로 그 실상을 파악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게다가 비록 피해당사자가 생존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비인간적 처우에서 오는 수치심 때문에 증언을 채록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저간의 조사경험에서 명백해졌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의 실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우선 이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또 이 문제들이 전체적인 문제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가늠해보는 순서로 접근해 보도록 한다.
이 문제들의 배경은,주지하는 바와같이 1930년대 이후의 일본 제국주의의 계속적인 침략전쟁이다. 일본제국주의는 31년에 만주침략,37년에 중일전쟁,41년에 태평양전쟁 등의 침략전쟁을 차례로 감행하게 되는데,이들 전쟁은 다른 한편에 있어서,일본경제의 중화학공업화 과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1937년의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군사공업화를 강화하게 되는데,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노동력의 동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1939년부터 「국민동원계획」 혹은 「근로동원계획」 등의 노동력 동원계획을 수립하게 되고,동원대상으로서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조선인도 당연히 포함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강제연행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바로 이 「동원계획」에 의한 노동력의 강제동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이 강제연행정책은 「대일본제국」내에서는 보편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조선인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조선내동원,즉 조선내 타지방으로의 강제연행이 있었는가 하면 일본·사할린·남양 등 외국으로의 강제연행도 있었다. 우리는 강제연행이라고 하면 자칫 해외로의 그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동원된 인원수에서 보더라도 전자가 후자보다 결코 적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당면의 문제로 되고있는 해외로의 강제연행에 한정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이 해외로의 강제연행에는 크게 나누어보아 다섯가지의 범주가 있었는데,아래에서 이들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로 근로동원,즉 집단근로강제연행이 있다. 이것은,강제동원의 주된 범주로서 1938년 9월부터 이루어지게 되는데,동원방법으로는 모집(38년 9월부터)·관알선(42년 1월부터)·징용(44년 1월부터)이 있었다. 징용은 청지의 징용영장이 발급됨으로써 법적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나 모집과 관알선은 「동원계획」에 따라 도·군·면의 관리가 사실상 강제로 모집·알선하였으나 법률적으로는 자발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이들은 일본·사할린·남양의 석탄광산·금속광산·공장 등의 미숙련노동자로 동원되었으며,계약근무기간은 처음에는 1년이었으나 그 후에 2년으로 연장되었다. 이들에게는 노동재해가 다발하는 지하노동이나 위험노동이 맡겨졌다. 39년 9월부터 45년 8월15일까지 이 범주로 동원된 숫자는,일본정부가 제시한 자료를 근거로 최소 72만인,최대 1백50만인으로 추산하기도 하나,우선 1백13만인으로 잡아둔다. 사망·부상자의 수는 아직 정확히 밝혀져있지 않다.
둘째로 군요원,즉 군속이 있다. 모집방법은,기본적으로 첫째의 경우와 같았으나,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42년 1월부터 징용을 실시한 점이 특이하다. 이들은,토목인부·운수요원·경리부요원·포로감시요원 등으로 이용되었는데,39년 9월부터 45년 8월15일까지 15만인이 동원되었다. 이들중에서는 다수의 사상자와 전범으로 처형된 자가 발생하였으나 그 숫자는 미상.
셋째로 종군위안부가 있다. 종군위안소는 1937년의 중일전쟁때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최근의 지방사연구에 의하면 광산위안소·공장위안소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군위안소의 운영은,현재로서는 아직 명백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군이나 군의 통제를 받는 업자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종군위안부가 어떻게 모집되었는지도 지금으로서는 거의 밝혀진 바가 없으나,어느 회고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예도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1941년 8월(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대소전의 결의하에 소만국경에 약 70만의 병력과 말 14만두·비행기 6백기를 동원하였던 관동군특별대연습때에 약 8천인의 조선인여성을 필요위안부양으로서 조선총독부에 의뢰하고,총독부는 도지사·부윤·면장에게 명령을 내려 「돈벌이가 좋은 일이 있다. 나라를 위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사냥하듯 끌어모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종군위안부가 어떻게 동원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대부분이 강제연행인 것이 틀림없는 것같다. 종군위안부로서는 조선인뿐만이 아니라 중국인·일본인·필리핀인 등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넷째로 병역동원이 있다. 38년 2월부터 「육군특별지원병령」이 실시되었으며,징병령은 43년 8월1일부터 실시되었으나,징집은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44년 9월1일부터 실시되었다. 그런데 조선에 있어서의 이 징병제의 실시는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즉 조선인에게 일본군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은,아직도 이러저러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인을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같은 일본국민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제도의 실시를 위하여 창씨개명·조선어사용금지 등의 황민화정책,즉 민족말살정책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인은,1938년 2월부터 1943년까지 지원병으로서 2만4천인이,1944년 9월부터 의무병으로서 21만인이 동원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자정신대,즉 근로정신대가 있다. 이 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23일의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하여 동원되었는데,동원대상은 만 12세로부터 만 40세까지의 여자였다. 동원방법은 도·군·면과 학교별로 할당된 듯하다. 어떠한 연령층이 동원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여러가지의 단편적인 자료로 보아 일본에서는 기혼부인이,조선에서는 미혼의 처녀가 많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된 것은 양국 여성의 근로관습의 차이에 기인한 바가 큰듯하다. 이들이 어디에 동원되어 어떠한 노동을 하였는지는 그 실태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근로정신대의 본래의 목적이 징병 또는 징용으로 결원이된 남자 노동력을 대신한다는 것이었으나,주로 그러한 방면에 동원되었으리라고 추측될 뿐이다. 얼마인지는 모르나 그들중 일부가 종군위안부로 전출된 경우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같으나,기본적으로 그들은 종군위안부와 그 범주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원된 수효는 수십만에 달한다는 추측도 있으며,조선내 동원이 해외로의 연행보다 많았던 것같다.
이제 이 정도의 예비적 고찰을 가지고 본론인 여자정신대와 종군위안부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앞의 강제연행의 여러 범주들중에서,근로동원·군요원·병역동원은 남자를 그 대상으로 하였고,종군위안부·근로정신대는 여자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양자는 여자를 동원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양자는 그 시기에 있어서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서로 크게 다르다. 다시 말하면 종군위안부는 1937년부터 45년까지 존재했으나 여자정신대는 1944년 8월부터 45년 8월까지 존재했을 뿐이다. 그리고,여자정신대는 기본적으로 근로정신대라는 점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러한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볼때 양자는 기본적으로 다른 범주였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같다.
이와같이 필자가,그 실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채 제도와 시기상의 차이를 중시하면서,양자를 기본적으로 다른 범주의 사실로 보고자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어떤 연구자가 추정하는 바와 같이 여자정신대로 동원된 수효가 수십만에 이르렀다고 한다면,그들중에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지금까지 생존해있는 자는 그 수효가 얼마나 될것인가. 그러므로 나는,양자를 같은 것으로 오인함으로써 「종군위안부는 칙령에 의한 것」 운운함으로써 남의 조소거리가 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여자정신대의 경험을 가진 가정을 보호해주기 위해서도 양자는 우선 엄격히 범주적으로 다른 것으로 전제한 뒤에 조사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주장이 결코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가 종군위안부로 전출된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자함도 아니요,또 종군위안부만 문제로 삼고 근로정신대는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사·연구의 수순으로서 양자는 제도상으로 달랐던 것이니 다른 범주의 문제로 전제하고,각각을 별도로 하나 하나 그 실상을 파헤친 후에 양자가 서로 관련되는 부분을 밝혀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 연구·조사작업이,우선 남의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고,또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채 남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한마디. 아침 신문을 보니,일본정부에서 한국정부에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어떻게 사죄·보상하면 되느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결자해지의 원칙상 파렴치한 짓이다.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고 또 자료도 가지고 있는 자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우리는 일본정부 스스로가 이 문제의 실상을 밝히고 보상방법을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일본정부가 이러한 죄과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보장을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일본의 평화체제의 구축만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