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첫 만남서 “공산주의 붕괴” 공감 협력/폴란드 1차 목표로 「정교신성동맹」 맺어/자유노조 활성화 「양동작전」… 「민주화도미노」 전략 성공레이건 전 미 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구자유화의 「공모자」였다.
이들은 지난 82년 6월7일 바티칸 교황청에서 처음 만난 순간 서로가 『동구 공산주의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동구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려는 극비전략까지 「모의」했다.
정치와 종교가 세계질서 변화를 위해 손을 맞잡은 것이다.
이들의 전략목표는 폴란드. 동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교황의 모국인 폴란드가 무너질 경우,인근 공산국가의 연쇄붕괴는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얄타협정으로 분할된 유럽을 개편해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은 신성동맹(Holy Alliance)을 맺고,폴란드를 서방진영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소련제국」의 심장에 비수를 박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은 폴란드내 자유노조의 활성화,지하저항조직 추진,선동선전술 전파,자금 및 물품지원을,교황청은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인도구호사업 등을 동시에 펼치는 「양동작전」을 구사키로 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후원세력을 확보한 순간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교황과의 회동후 3주안에 국가안보결정명령서(NSDD) 32호를 발동시켜 「폴란드전략」을 구체화시켰다.
이 명령서에는 ▲자유노조지원 및 극비작전강화 ▲가톨릭 등 종교탄압을 비롯한 인권상황 개선방안 ▲외교적 고립안 강구 등이 담겨 있었다.
바티칸 교황청은 현지 성직자 및 성당을 통해 인권 및 정부동향,수감자 상황 등 각종 정보를 수집한뒤 미국 행정부에 전했다. 또한 레이건 대통령도 백악관에 수집된 각종 고급정보를 올라오는대로 바티칸에 통보했다.
백악관과 교황청의 정보교환에 참여한 윌리엄 케이시 CIA국장,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윌리엄 클라크 안보담당보좌관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바티칸측에서 실무진으로 참여한 인사들도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친미 성향을 띠어 유기적인 협력체제를 이뤘다. 관계자들은 미국이 일선에서 물량적인 지원작전으로 자유노조의 역량확충에 나선반면 교황청은 전체적인 상황을 분석,평가하는 등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증언한다.
백악관의 교황청의 「전령」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버논 월터스 미 특명전권대사와 피오 라기 교황청 사절대표였다. 월터스 대사는 교황청을 12차례 이상 드나들며 레이건 대통령의 의지를 교황에 전했고 라기 추기경도 케이시 국장 클라크 보좌관과 교분을 두터이하며 백악관을 수시로 방문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자유노조로 하여금 무력봉기가 아닌 선전선동술로 정권에 맞서게 했고 이 전략은 주효했다. 미국은 현지 가톨릭신부들과 미 정보요원,미국 노동총연맹 산업별회의(AFLCIO) 대표부를 통해 수톤에 달하는 인쇄 및 통신·방송기기를 폴란드에 밀반입시켰다. 이후 자유노조는 밀반입된 인쇄기를 통해 「서방의 자유,자유노조의 활동」 등을 담은 온갖 유인물을 찍어내 폴란드 국민의 동요된 민심을 끌어들였다. 또 방송기기를 이용,정부의 관제방송 중간중간에 「자유노조만세」 「봉기하라」는 삽입방송을 내보내는 게릴라전술도 썼다.
폴란드 공산정권과 소련은 마침내 백악관과 바티칸 교황청의 「신성동맹」이 가한 도덕적·경제적·정치적 압력에 마침내 굴복했다. 정치범들은 해방되고 공무원 모독죄로 기소된 바웬사에 대한 소송도 취하됐다. 폴란드 공산당은 이후 분열국면에 접어들었고 국가경제도 계속되는 노조파업과 미국 등의 경제제재로 비틀거렸다.
마침내 폴란드정부는 그동안 봉쇄했던 교황청과의 대화통로를 재개했다. 88년 6월에는 바오로2세가 동포의 환영을 받으며 폴란드를 방문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88년7월 자유노조의 협력없이는 폴란드정부의 통치는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기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90년12월 레흐 바웬사는 대통령직에 올랐다.<정리=이상원기자>정리=이상원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