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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정치판을 보면…/신윤환 서강대교수·정치학(시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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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정치판을 보면…/신윤환 서강대교수·정치학(시사칼럼)

입력
1992.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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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이번 총선에서 기권합시다. 여당을 찍는 것이 경제성장과,야당을 찍는 것이 민주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번 선거에서 우리 모두 기권합시다. 누구를 찍어도 이제 듣기 조차 지긋지긋한 TK,YS,「떠오르는 태양」을 위해 투표하는 꼴이 되고,어느 계파가 더 많은 당선자를 내든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할 이번 선거에서 기권해 버립시다. 우리 민족,국가,무엇보다 우리 민초들의 하루하루의 삶과 내일에 무관하게 합당·분당·이합집산하는 파벌당,지역당,재벌당,금배지병환자당을 위해서 투표장에 가는 수고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미련없이 기권합시다.앞으로 남은 한달여,이미 반쪽으로 갈라진 한반도를 다시 동과 서로,그것도 모자라 중부와 남부로,이북출신과 이남출신으로 갈라 놓을 정치판을 차라리 외면해 버립시다. 사이좋던 전주사람과 완산사람을,의령사람과 함안사람을,호남출신 동작구민과 영남출신 동작구민을 갈라 놓을 동네싸움판을 거부합시다. 직장에서 술자리에서 정치이야기는 삼갑시다. 상사와 부하직원간,동료사이,친구사이,심지어는 부부사이까지 갈라 놓을 이번 총선에 끼어들지 맙시다. 일생을 독재타도에,민주화투쟁에,민중운동에 바친 이들까지 분열시키고 말 이 총선은 민주정치와 복지경제의 적입니다. 구국이 아닌 망국의 잔치입니다. 한달동안 신문의 정치면은 보지도 맙시다. TV는 옛날처럼 뉴스시간 10분이 지난 뒤 틀고 정치뉴스는 제작도 하지 맙시다. 귀를 막아도 막아도 들려오면 귀를 씻읍시다. 그리하여 세파에 시달려 얼마남지 않은 우리의 정서를 낚시터에서의 휴식을 위해 아껴둡시다.

내 젊은 시절 다 바쳐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집 한칸 마련하지 못하게 하는 오늘의 정치꾼들 이아기는 더 이상 믿지 맙시다. 이 자들은 일생을 두고 감언이설과 빈말로 국가,민족,사회,서민을 속이고 희롱하고 판 자들입니다. 하루에 두세시간씩 밀고 밀리는 밟고 밟히는 지하철에,때로는 굼벵이 같고 때로는 성난 사자같은 버스에 실려,도시의 소음과 매연을 뚫고 과로와 스트레스만 약속하는 일터로 향해야 하는 우리의 아까운 시간을 앗아 가려는 정치꾼들은 선량지망생이 아닌 한량입니다. 신도림역에서 인천가는 전철을 갈아타본 적도 없을 이들이 세치 혀만으로 우리들의 대변자가 될수는 없습니다.

억을 뿌리든 수십억을 뿌리든 외면합시다. 도박판의 판돈같은 더러운 돈입니다. 정경유착으로,탈세로,착취로,투기로 번 돈입니다. 부정부패로,정치적 공갈과 협박으로 빼앗은 돈입니다. 그 돈은 일년에 두세번씩 행해지는 선거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룸펜들에 의해 우리 사회를 좀먹는 퇴폐향락업소에 뿌려지고 말 돈입니다. 그 더러운 돈이 우리의 신성한 가정에 침투해서도 안되고,우리의 빛과 희망인 자식들의 양육에 쓰여질 수는 더욱 없습니다. 더러운 돈과 썩은 정치를 바꾸는 것이 암시장에서는 서로 수지맞는 장사일지 몰라도,그 돈에 우리의 믿음과 신의를 팔 수는 없습니다. 고발하지도 맙시다. 모두가 모든 부정선거운동에 고발정신을 발휘하면 감옥소를 짓는 예산에 세금을 더 내야 할 것이고,14대 국회는 유치장에서 개회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정치가 막되어 먹은 판이라도 나라체면만은 지켜줘야지요.

기권도 정당한 참여행위입니다. 당당한 의사표현 방법입니다. 어느 야당의 주장처럼 기권으로 특정 정당을 돕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특정 정당은 더더욱 우리의 기권의 표적이니까요. 기권한다고 깨끗하고 자유로워야 할 우리정치,풍요롭고 평등해야 할 우리경제,안락하고 쾌적해야 할 우리의 생활공간을 만드는데 무관심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조그만 집에 사는 사람,전철타고 버스타고 출퇴근 하는 사람,성실히 하루 하루를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침묵하는 다수처럼 우리 주위의 진짜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애환을 모르는 지금의 정치풍토,정치제도,선거법,기성 정당과 정치인을 거부하자는 말입니다. 선심공약 남발하는 여당,한달전에야 공약을 발표하겠다는 야당,몇푼어치 안되는 명성이라도 있으면 이사람 저사람 사느라고 정신팔린 신당,이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의 기회를 우리는 사양합니다.

선거하는 날이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이면 낚시나 갑시다. 벌써부터 낚시로 소일하고 있어야 할 3김씨,낚시하러 가라고 꾸짖던 또 다른 김씨까지도 비워준 낚시터에서 삶에 찌든,일의 피로에 지친,정치에 시달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루라도 쉬게 합시다. 우리는 선거 다음날 또 일해야 하니까요. 정치꾼 없는 그날의 낚시터는 어느 날보다 한가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고기도 더욱 잘 물겁니다. 목소리 큰사람,싸움질 잘하는 사람,입으로만 고기잡는 사람은 모두 먼곳에서 돈계산,표계산,숫자놀음에 바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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