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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복구기 산업(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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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복구기 산업(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26)

입력
1992.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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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원조자금 바탕 공장건설·가동/기업인들 대부분 소비재산업 치중/이병철도 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정주영은 미국인과 직거래 건설업 성장 토대마련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총성이 멎자마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힘찬 건설사업이 시작됐다. 전쟁중에 파괴된 공장의 재건이 시작되고 새로운 기간시설 및 소비재 생산공장들이 속속 세워졌다. 여기에 동원된 자금은 미국의 원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53년부터 61년까지 계속된 운크라(UNKRA) 및 ICA자금 등 미국의 원조는 21억달러. 이들 원조자금은 우선 비료 시멘트 유리 등 기간공장 건설에 투입됐고 이어 소모방,면방적기,염색가공공장,자전거부품공장,동력기계공장,제지공장 등 공업부문의 건설에 배정됐다.

충주 양양철광산과 장항제련소 등에 ICA의 대충자금이 지원되고 대한중공업을 재건하기 위한 원료탄 구입자금이 배정됐으며 대한조선공사에는 도크설비와 시설확장 및 보수비가 지원됐다. 또한 일반 공작기계,전기로,용접기 등 시설자재 구입자금과 어선건조자금을 비롯,방직 목재 화학 제약 제지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미국의 원조자금이 배정됐다.

삼성의 이병철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눈을 돌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그는 제일제당 설립에 필요한 18만달러를 정부의 특별외화대부로 조달하고 제일모직을 설립하는데 들어간 1백만달러는 FOA원조에 의존했다. 당시 제일모직에 5억환의 융자를 결정한 유완창 부흥부장관. 『당시의 실정으로 볼때 특정기업에 5억환이라는 막대한 정부보조가 나간다면 특혜라는 비난을 면할수 없었다. 국회의 공기도 험악했으며 신문도 연일 떠들썩했다. 게다가 부흥부는 물론 ICA에도 연일 각종 공작이 날아들었다』

원조자금 배정과 정부의 지원이 어려웠음을 말해주고 있다. 기업인들의 정부 로비가 끊일 사이 없었다. 더욱이 원조자금을 배정한 ICA와 운크라에 대한 로비는 치열했다. 낙희화학 대성목재 동아제약 유한양행 대동공업 대한전선 등 오늘날 재벌의 뿌리가 되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 기간중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가동을 시작하고 원료를 공급받았다. 미국 원조기관의 위세는 드높았다.

53년 이후 가장 많은 원조자금을 주무른 것은 ICA였다. ICA는 전후 복구자금으로 제공된 21억달러의 80%에 가까운 17억달러에 대한 배정을 직접 관장했다. 이때 ICA의 책임자는 타일러 우드였다. 당시의 한국경제는 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과 우드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불화의 원인은 원조물자 불하. 이 대통령은 원조는 원조에서 끝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측은 우리의 행정체계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원조의 배정을 한국측에 일임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조선호텔에 묶고 있는 우드미션,ICA한국주재단 일행을 내몰라고까지 지시했다.

우드미션과 이 대통령이 가장 마찰을 빚은 것은 바로 원조물자 불하로 충당된 대충자금의 사용을 놓고서였다. 우드미션은 원조에 의해 조성된 재정자금(소위 대충자금)의 사용비율을 소비에 70%,투자에 30%를 할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 대통령은 그 반대였다. 즉 미국의 원조를 한국의 산업 재건에 중점활용하려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의 원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원조물자는 소비재이거나 최종소비재가 공업에 필요한 원료물자였다. 즉 생산재와 소비재간 균형있는 산업구조의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소비재편중형 산업구조를 가져왔고 이 결과 대외의존형 한국경제의 구조를 정착시켰다. 이는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50년대 말부터 국내 성장이 급속히 둔화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PL(미공법)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의 무상도입이다. 미국의 무상양곡 원조는 한국의 배고픔을 분명 어느정도는 해소시켰으나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농산물 재고를 소비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1958년 정부가 국내 양곡부족량을 4백39만석으로 추산했으나 실제 도입된 양곡은 6백57만석으로 무려 2백만석이나 초과됐던 사실만봐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내 기업인들이 특혜성격의 정부지원에 의존하여 성장하려는 대외의존적 경영의 뿌리는 당시의 원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원조자금의 불하와 배정에 있어서 정치권과의 고리,적용된 환율과 시중환율과의 괴리,일반금리와 산업은행을 통해 지원된 정책자금의 금리차등은 곧 정부와 밀착해서 특혜를 받기만 하면 바로 기업성장으로 연결되는 파행적인 경영행태를 낳았다.

어쨌든 기업인들에게 미국원조는 기업성장의 유일한 젖줄이었고 원조를 더 많이 받은 기업은 빨리 성장하고 달러확보전쟁에서 뒤진 기업은 그만큼 뒤켠으로 물러앉을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권과의 결탁이 불가피했다.

전쟁복구기 동안 대부분 기업인들이 원조자금에 눈을 돌리는 사이 현대건설의 정주영은 미국인들과 직접 거래하는 건설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선경그룹의 창업자 최종건은 관리를 맡고있던 적산기업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기업의 틀을 갖췄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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