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장안최초의 민간종합병원 건물/한량들 「출입」 영광으로 여기기도/일 장교숙소·학도병 본부로 유전부산 동구 초량2동 467 속칭 텍사스 골목입구에 있는 허술한 5층짜리 건물이 부산최초의 민간종합병원인 백제병원이었고 일제때는 유명한 중국요리집 봉래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백23평의 대지에 연건평이 6백여평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부산시내에서 손뽑히는 큰 건물이었다.
철근콘크리트 골조에 붉은 벽돌로 단장한 봉래각 건물을 지은 사람은 당시 경남 김해군 명지면(현재 부산 강서구)출신 의사 최용해씨. 부유한 집안 출신인 최씨는 중학을 마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카야마 의전을 졸업하고 일본 여성과 결혼한 뒤 고국에서 개업하기 위해 귀국했다.
최씨는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에서 대출받은 3만원과 사재 3만원을 합친 6만원의 거금을 들여 초양명태 창고옆 빈터에 5층건물을 짓고 백제병원을 개원했다.
의사와 간호원을 합쳐 의료진만 30여명이나 되고 40개의 병상을 갖춘 백제병원은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 3대병원중의 하나로 최신 시설과 호화의료진을 자랑했다.
그러나 최원장은 거리에서 객사한 행려병자의 시체를 표본으로 만들어 병원에 보관해 온 사실이 알려져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은행대출금 이자도 갚지 못한채 1932년 개원 10년만에 병원 처분권을 친구에게 위임하고 도주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했다. 그 후 채권자인 동척은 백제병원 건물을 중국인 양모민씨에게 팔아 넘겼댜.
양씨는 건물 내부를 호화롭게 개조,중국 음식점을 개업하고 봉래각간판을 달았다.
봉래각은 중국영사관을 중심으로 중국인상가가 몰려있던 「청관거리」에 자리 잡은데다 음식맛이 일품이어서 늘 단골 고객으로 붐볐다.
당시 내노라하는 한량들도 봉래각에서 중국요리맛을 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
봉래각은 영주동의 초량일대 기생들이 조직한 기생조합 봉래권번 소속 기생들이 드나들면서 노래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봉래권번에 맞서 서울 평양 등지에서 내려온 기생들도 동구 초량동 597일대에 초량권번을 조직,봉래각에 출입했는데 한동안 세련된 용모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기를 끌었다.
초량권번 기생들은 국악보다는 유행가를 잘 불러 특히 고복수의 「타향살이」,김정구의 「왕서방연서」 등 애절한 사연의 노래가 18번이 됐다.
「꽃다운 이팔소녀 울어도 보았으며」로 시작되는 이화자의 「화류춘몽」은 풋사랑에 실패한 뒤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과 웃음을 팔아야 하는 기생들의 심경이 담긴 노래로 기생들 사이에 히트곡이었다. 중국 음식맛과 기생들의 노래가 유명해지자 봉래각은 부산부에서 열린 대소연회를 모조리 끌어들일 만큼 인기가 높았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양씨가 가산을 정리해 중국으로 돌아가자 부산에 주둔했던 일본군 아카츠키(효)부대가 봉래각을 접수,장교숙소로 사용했으나 해방후에는 귀환한 학도병들로 조직된 치안대의 본부건물로 쓰였다.
6.25동란후 봉래각은 다시 중국인 손에 넘어가 2층은 중국음식점,3층은 신세계 예식장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지난 72년 불이나 나무로 장식된 내부 모두 불탔다.
현재 이 건물 주인인 유용호씨(71)는 『건물이 낡아 지난 90년 신축하려고 철거를 시도했으나 워낙 튼튼히 지어져 포기했다』면서 『지난 85년 건물을 인수할때는 주위 사람들이 「터가 센 곳」이라고 매입하는 것을 말렸지만 사무실·가게 등으로 몇년 더 임대한 뒤 새 건물을 지을 예정』이라고 말했다.<부산=김종흥기자>부산=김종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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