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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원조불 쟁탈전(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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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원조불 쟁탈전(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25)

입력
1992.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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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상태 기업인들에 “회생의 젖줄”/61년까지 전쟁복구비 31억불 받아/시멘트·방직공장등 건설자금 활용/김성곤은 금성방직재건 쌍용그룹 토대구축1953년,전쟁은 막바지에 달해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남과 북 양측은 영토를 한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후방의 전쟁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바로 기업인들의 달러확보전이다.

전쟁의 폐허속에서 벌어진 달러전쟁은 미국의 원조를 따내는 것이었다. 해방이후 자본이 전혀 없는 이 땅에 유일한 젖줄은 미국의 원조였다. 미국의 원조는 해방된 1945년부터 시작됐다. 61년까지 16년 동안 미국은 빈사상태에 빠진 이 땅에 총 31억3천7백30만달러를 풀었다. 당시의 31억달러는 요즘 돈으로 환산하여 7백억달러는 될 것으로 추산된다. 실로 엄청난 자금이 이 땅에 흘러들어온 것이다. 미국의 원조가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를 왜곡시키고 미국의 과잉재고품을 처리하는 창구가 되기도 했으나 자본이 없던 우리나라에는 큰 자금줄이었던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1945년부터 48년까지 총 4억1천만달러가 공급된 점령지역구제자금(GARIOA)은 해방이후 과도기적 정치 사회 경제적인 불안을 덜어줬고 49년부터 시작된 ECA 및 SEC(전시긴급구호원조) 자금은 53년까지 2억2백만달러로 전시의 자금줄이 됐다. 전쟁이 나자 한국 민간구호계획에 의한 CRIK원조가 시작됐다. 이들 원조는 당초 대한민국정부의 수립과 함께 한국경제의 자립을 후원할 목적이었으나 전쟁과 함께 완전 구호자금으로 변질돼 식품 의약품 섬유 등 전시 구호물자를 구입하는 자금으로 쓰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원조의 성격은 구호물자 조달에서 전쟁복구로 바뀌었다. 16년 동안 계속된 원조의 대부분은 이 기간중에 풀렸다. 53년까지 10억달러가 공여됐고 54년부터 61년까지의 원조는 전체의 70% 가량인 21억달러에 달했다. 전쟁복구에 활용된 원조는 UNKRA(유엔한국재건단),ICA(국제협조처),P·L미공법 408호 원조 등이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인 P·L 480호 원조는 미국의 농산물을 무상으로 들여온 정부가 이를 팔아 재정자금으로 활용했다. 이것이 대충자금이다. 원조는 기본적으로 정부에 제공되는 것이다. 당연히 원조물자와 자금의 배정권은 정부에 있었고 특혜시비를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수입자금으로 쓰인 달러는 경매에서 불하되는 즉시 2,3배의 이문을 남기는 돈방석을 의미했고 경제복구자금으로 확보한 달러는 곧 공장하나를 갖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재벌들의 초기 자본축적 메커니즘이다.

기업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을 준 것은 UNKRA자금이었다. 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풀린 이 자금은 60년까지 총 1억2천2백만달러에 달했고 이중 70% 이상이 시설재도입에 활용됐다. 운크라원조는 우선 문경 시멘트공장과 인천 판유리공장·충주비료 등 3대 기간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운크라가 건설하던 인천 판유리공장을 불하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병섭은 이를 불하받기 위해 대한유리라는 회사를 차렸고 금성방직의 김성곤은 운크라원조를 겨냥하여 피란지 부산에서 금성방직 안양공장의 기술자 7명과 밤을 새워가며 전쟁으로 완전 망가진 안양공장의 복구계획을 세웠다.

『1954년 운크라는 2백70만달러의 방직 및 제지시설 도입자금을 배정했다. 기술자들과 셋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세운 방직공장 설립계획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안양 방직공장 건설계획서와 설계도를 한 보따리 싸들고 운크라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관계자는 2백70만달러의 배정금이 이미 광주 부산 등지의 기존 방직공장 증설용으로 배정됐고 안양은 대공군사방위선인 워커라인 북쪽이어서 배정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쌍용그룹 전신인 금성방직의 김성곤. 그는 워커라인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이미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휴전상태에 있는데도 미국은 전쟁초기에(1·4후퇴때) 그어놓은 방어선인 워커라인에 얽매어 한강 이남인 안양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포기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말없이 보따리를 들고 나와 광복동에 있는 연합신문 양우정사장에게 갔다. 양우정은 김성곤이 주인인 동양통신의 사장이기도 했다. 김성곤은 그게 워커라인과 재건사업의 불합리를 언론에서 다뤄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워커라인은 일종의 군사기밀이었다. 양우정은 워커라인은 거론하지 않은채 「한강이북의 기간산업을 우산 재건함으로써 한국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의욕과 확신을 고취시키라」는 논조의 글을 실었다. 곧 전 언론이 운크라 사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고 이에 놀란 운크라측이 김성곤에게 금성방직의 재건계획을 승인했다. 쌍용그룹의 시작이었다.

각종 원조자금의 배정과 함께 한국의 재벌들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삼성의 이병철은 전후 복구경기를 타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세웠고 최주호는 한국모방,김한수는 경남모직을 설립했다. 이어 각종 면방직회사와 제분·제당·시멘트회사 등 이른바 3분산업이 틀을 갖췄다. 이 때에 세워진 회사들이 오늘날 재벌형성의 기폭제가 됐다. 운크라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승찬이 락히 브랜드의 빗으로 기업의 틀을 갖춰나가던 구인회의 낙희화학(현(주)럭키) 경영에 참여하는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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