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청구권 소멸… 사죄 안될말”/“남북은 「과거」로 장사하나” 비방/“종군위안부 현지여성 보호위한 제도” 정당화도【동경=문창재특파원】 종군위안부(여자정신대) 문제에 대해 사죄한 일본정부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돼 요즈음 일본에 반한 혐안감정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일부 월간지들이 미야지와(궁택희일)총리의 한국 방문성과에 대한 대담 및 기고를 통해 미야자와 방한때 한국데모대가 일본 국왕의 모형을 불태우고 일본대사관에 달걀을 던진 행위를 클로스업 시킨데 자극받은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월간지 문예춘추는 3월호에 「사죄할수록 나빠지는 일한관계」란 제목의 한반도문제 전문가 대담기사를 실었다. 「열매없는 미야자와 방한을 꾸짖는다」는 부제가 붙은 이 대담기사의 서두에서 다나카 아키라(전중명·탁식대) 교수는 『한국의 되풀이되는 사죄요구와 일본의 사죄로 일본인의 반한·혐한 감정이 증대됐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야자와 총리가 정상회담후 기자회견을 하면서 『쓰라린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는 것 같다』고 종군위안부 문제에 사과한 말과 표정에 정말 실망했다면서 『그런 일을 되풀이 한다면 일본정부는 국민의 강렬한 보복을 받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나카 교수의 대담역인 사토 가쓰미(가등숭사·월간 현대코리아주간)씨는 일본의 상징인 아키히토(명인)왕의 모형을 불태우고 일본의 얼굴인 주한 일본대사관에 달걀을 던진일은 명백히 예의에 벗어난 행위이므로 정부는 확실히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이 대담에서 사토씨는 식민지 시대에 대한 한국인의 보상청구권은 65년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소멸됐다고 거듭 주장했다.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협정 제2조에 『그 문제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명기돼 있음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와 국가간의 협정이지,개인이 입은 피해는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일본정부측 공식발언이나 국제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또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청구 소송을 낸 한국인 B·C급 전범 출신자와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해 일본이 할만큼 해 주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안전보장문제연구회 사무국장은 일본정부와 교섭해 전범출신들이 동경도영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전체에 1천만엔의 보조금,1인당 10만엔씩의 「떡값」을 주었으며 택시회사 면허를 내준 사실을 말한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차원의 보상이 아님을 의식한듯 10만엔씩의 「떡값」이란 표현을 썼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게도 민간단체가 8천만엔을 모금해주었고 한국에 진료소를 만들고 의사단체를 보낸일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전쟁원호법과는 달리 유일하게 국적조항이 없는 원폭피해자원호법을 운영하면서 일본정부가 한국인 피해자를 여러가지 이유로 외면해온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민간단체의 모금이 정부의 보상과는 관계없음도.
한편 다나카씨는 『한국에서 종군위안부와 여자정신대를 혼동하고 있다』면서 종군위안부의 숫자를 8만에서 20만명이라 하고,그중 대다수가 한반도 출신이라는 보도는 근거없는 일이라고 몰아붙였다. 또 사토씨는 『종군위안부는 현지 여성과의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고 말해 세계에 유례가 없는 종군위안부가 점령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인도적인 제도인 것처럼 정당화 했다.
한편 문예춘추사가 발행하는 또다른 월간지 「제군」 3월호는 권두언 성격의 「신사와 숙녀」라는 고정란에서 신사숙녀답지 않은 비열한 표현으로 한국을 비방했다.
『종군위안부는 당시 일본이 인정했던 공창제도의 일부였다…. 병사가 가는곳에 여자가 필요한것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가졌던 생각과 같은 것이다…. 너희들은 한번이라도 베트남에 사과했는가…』
『코리아는 남이나 북이나 과거문제로 장사하는 것인가』
『한국 대통령에게 조화천황도 지금 청황도 사과했다. 미야자와는 천황을 서울에 보내 사과시키려는 것인가. 그렇게 하고싶다면 한국대통령과 중국주석이 하노이에 가서 베트남전쟁과 중월전쟁을 사과하고,네덜란드 여왕이 인도네시아에 가서 식민지화를 사과하고,이탈리아 대통령이 영국에 가서 로마시대의 침략을 사과하는 등 국제적인 대사죄게임 속에서 해달라』
권위있는 시사잡지의 권두칼럼으로는 믿을 수 없는 감정적이고 편협한 「비방」은 한국에서 일본 자동차를 한대도 볼 수 없다는 대목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잡지들이 발매된뒤 일부 독자들은 한국인들에게 직접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동경특파원 사무실에도 몇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후세대 여서 지나간 일을 잘 모른다고 전제한 40대 전반의 한 남자는 달걀사건과 「화형식」을 거론하면서 『한국인들이 계속 그러면 반한·혐한감정의 확산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의 진상을 잘모르는 전후세대들이 편협한 보도에 격앙하는 것을 피부로 체험하면서 한일간에 드리워진 임담한 먹구름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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