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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불 그후」(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 이력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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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불 그후」(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 이력서:24)

입력
199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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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 재무부 관련자들 오히려 승진/세인 이목에 마지못한 수사 흐지부지/“들러리” 농림부장·차관 사임으로 종결/정치자금 선납·물자압류… 미진상사등 사양길중석불 사건은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나 뒤처리는 개운치 못했다. 정치적인 흑막이 개입된 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지못해 손을 댄 검찰은 미진상사 이연재와 남선무역 김원규,영동기업 최점석,신한산업 강한욱 등과 해당기업의 임원진 몇명을 기소했으나 공판정에는 담당검사가 입회조차 하지않아 공판이 연기되기도 했다. 재판부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하여 피고인들에게 영장을 발부했으나 영장이 집행된 것은 한 건도 없었다. 부산지검 검사장은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주모자를 체포하도록 경남도 수사과에 엄중시달했다고 발표했으나 영장을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정부관계자들의 뒤처리도 석연치 못했다. 중석불을 불하한 재무부 관계자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중석불로 양곡과 비료를 수입토록 추천한 농림부쪽만 장·차관과 양정국장이 사임했다. 정부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백두진의 말대로 별것 아닌 사건쯤으로 이를 얼버무린 것이다.

중석불 사건으로 옷을 벗게 된 함인섭 농림부장관의 회고. 『당시의 핍박했던 식량과 비료사정을 완화하기 위해 농림부장관이었던 나는 중석불로 식량을 수입하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환영했다. 당시 정부에 의한 식량수입은 여의치 않았으나 개인상사에 의한 수입은 신속하게 이루어져 이를 마다할 수 없었다. 농림부가 추천했다는 불하대상 상사는 사실 재무부에서 이미 결정돼 내려왔고 다만 농림부는 형식적인 추천절차만 이행했다. 이 추천대상에서 제외된 상사들이 갖은 험구를 퍼뜨렸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세상을 뒤흔들었다』 결국 모든 일은 재무부에서 맡았으면서도 피해를 본 것은 힘없는 농림부였다.

함 장관의 뒤를 이어 농림장관으로 중석불사건의 뒷수습을 맡게 된 신중목장관은 보다 정확하게 당시를 밝혔다. 『중석불사건은 재무부에서 계획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지절러 놓은 일이었다. 농림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상권 법무부장관은 중석불 사건을 가라앉히기 위해 원용석차관과 김경수 양정국장을 구속해야겠다고 했다. 내가 앉힌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상 더 이상 거론치 말자고 했지만 결국 이들 둘은 분위기에 밀려 자진해서 사퇴했다』

반면에 백두진 재무장관과 박희현차관,최도용 이재국장,황호영 이재과장은 얼마 안있어 모두 승진함으로써 세간의 의혹을 분명하게 했다. 중석불사건으로 농림장관 자리를 내놓은 함인섭의 회고. 『뒤에 생각하니 당시 국회 재경위원장이었던 이재형씨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나에게 이 박사가 재선되기 전이라도 제각기 나서 이 박사에 대한 서로의 공과를 다툴 판국이고 이 박사가 재선된 마당이니 서로의 공다툼은 더욱 치열하다. 이번 중석불사건도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이 중석불사건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믿고 있다』

여하튼 중석불사건은 정치권의 소용돌이와 함께 기업인들의 부침을 가져왔다. 중석불사건이 법정으로 비화하기 전에 쌀과 밀가루 비료 등을 도입하여 처분한 업자는 횡재를 했지만 사건에 연루된 미진상사나 고려흥업 등 일부업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정치자금은 이미 선납되고 도입물자는 압류되거나 정부의 임의처분에 맡겨졌으니 선납한 정치자금과 불하대전을 몽땅 날린 것이다.

『농림장관을 맡은 지 며칠 안돼 김모라는 젊은 사장 한명이 찾아왔다. 그는 장관실에 찾아와 정부로부터 정당하게 중석불을 배정받아 수입해 놓은 소맥분을 농림부가 왜 자유판매금지조치를 취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이것을 자유판매토록 허용치 않으면 은행빚과 사채때문에 살 수 없으니 오늘밤에 바다에 나가 빠져죽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대성통곡하며 졸도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신중목 당시 농림장관의 회고다.

그러나 중석불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기업인은 당시 무역업계를 주름잡던 미진상사의 이연재.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삼양양산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양산제조 수출입업을 하다 1942년 본거지를 부산으로 옮겼다. 일제가 무너진 뒤 그는 미진상회라는 무역상을 차렸다. 당시 대일수출 상품으로 인기를 끌었던 천초를 비롯하여 수산물을 취급하면서 6·25때에는 이미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정부가 부산으로 피란와 군수물자 취급기관으로 승리공사를 발족했을때 그는 선뜻 건물 한 동을 기증하는 기민성을 발휘,정치권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그는 또 무역협회가 부산으로 내려오자 사무실 일부를 무역협회 사무실로 쓰도록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중석불 90만달러를 불하받은 것이 화근이 돼 구속되고 막바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흥아타이어로 재건의지를 보였으나 한번 기운 운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정경유착에 능했던 기업인의 말로였다. 정상적인 경영이 아닌 기업의 말로로는 당연한 결과였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후 우리의 기업사는 적절한 유착이 적절한 기업의 성장과 직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들어 부동산 매각과 주력업종 선정 및 소유와 경영의 분리 등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정부와 기업의 불협화음은 이러한 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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