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등 각종 사건현장 종횡무진/72년 수송동시대 마감후 사양길로 들어/“이젠 한낱 구경거리로…” 대원 10명 착잡서울 종로구청 담을 따라 한국일보사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국세청 건너편에 이마,대림 등 2개의 빌딩이 키재기를 하듯 우뚝 서있다.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 일대. 지금은 도심에서도 손꼽히는 금싸라기 땅이지만 72년까지는 서울시경의 기마경찰대 자리였다. 이곳은 옛부터 말과 인연이 깊어 이조 태종때에는 궁중의 말을 맡아 관리하던 「사복시」터였다. 45년 9월 기마경찰대가 창설된 뒤 1백여명의 기마경찰 요원들은 1천5백여평의 마장에서 1백여두의 애마를 길들였다.
기마경찰대는 서울시내를 사직동,효창공원 주변,남산일대 등 4개 지역으로 나눠 2인1조가 상·하오 두차례 4시간씩 정기순찰을 돌았다.
높은 건물이 없던 때라 말을 타면 골목 구석구석까지 시야가 미쳤고,멀리서도 이들의 위엄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순찰전 주변에선 감히 범죄를 저지를 수 없었다.
각종 행사의 선두에 서서 늠름함을 뽐내는가 하면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출동,도보경찰 1백명의 몫을 해냈다.
대규모 행사의 인파,교통정리는 물론 화재현장에서 구경꾼을 해산시키고 시위진압에도 앞장섰다.
기마대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때는 격동기였던 해방직후 3∼4년간.
기마대는 46년 9월 철도파업,47년 3월의 좌·우익 3·1절 충돌사태,48년 4월 영등포전화중계소 방화사건 등 수많은 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성가를 높였다.
말타기를 즐긴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씨는 승용차 대신 기마대소속 말을 타고 기마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출퇴근하기도 했다.
48년 10월17일 순찰중이던 기마대원 조병호순경이 경무대 근처에 묻혀있는 지뢰 5개를 발견,이승만대통령 암살음모를 막아낸 일은 기마대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조 순경은 대통령 특명으로 1계급 특진됐다. 영광의 뒤안길에는 상처도 많았다. 6·25전쟁이 터진뒤 수도 서울을 지키던 기마대가 28일 새벽 남하를 시도하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당시 현영린대장을 비롯 8명의 기마대원이 납북된 사건은 기마대사상 가장 불행했던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인도교폭파 책임을 맡은 장교가 말발굽소리를 탱크소리로 오인,예정보다 빨리 다리를 폭파시켜 기마대의 남행이 좌절됐다고 전해진다.
60년대 중반이후 사이카 등 새로운 경찰장비가 보급되고 도시교통이 복잡해지면서 기마대는 점차 사양길을 걷게 됐다.
65년 서울시경 장비계 시설부지로 창고자리를 떼어주면서부터 기마대터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72년엔 수송동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성동구 성수동2가 333 주택가 한가운데로 밀려나게 됐다.
마장이라야 6백40여평에 말은 20두뿐이고 10명의 기마요원이 상주하며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4월 한강경찰대 발족과 함께 봄 여름 가을에는 한강시민공원의 범죄예방에 투입돼 활기를 찾는듯 했으나 급격한 도시환경의 변화로 제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기마경찰대 대장 한응수경위(57)는 『도시치안의 일익을 담당하던 기마경찰대가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은 착잡하지만 세태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몇안되는 기마경찰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타고 방범활동을 하다니 지금이 무슨 삼국시대인 줄 아느냐』는 기마대 폐지론자들의 주장에 밀려 예산지원 요구는 번번이 묵살돼 버리고 만다.
51년부터 10여년간 기마대원이었던 나종극씨(59·대한승마협회 심판위원)는 『갈기를 휘날리는 말위에 탄 기마경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도심에서는 영원히 볼 수 없게돼 섭섭하다』고 말했다.<이희정기자>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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