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노동당 키녹당수 「이적발언」 파문/“영 핵정책비난 소련입장 지지했다” 폭로/노동당선 “보수당의 선거전략” 즉각반격/보도공정성도 논란… 총선 앞두고 최대쟁점 부각【런던=원인성특파원】 올봄의 총선거를 앞두고 뜨거운 정책공방을 벌이던 영국의 정국에 한 신문의 야당지도자에 관한 폭로기사가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세금과 의료정책 등을 둘러싸고 모범적인 정책대결을 벌여오던 영국정국이 갑자기 이전투구장으로 변하게 된 것은 지난 3일자 더 타임스지의 기사가 발단이 됐다. 이 신문의 일요판인 선데이 타임스는 이날자 1면톱으로 소련의 공식문서에서 노동당과 크렘린간의 대화내용이 밝혀졌다는 기사를 싣고 두 페이지에 걸쳐 대화내용을 상세하게 수록했다. 지난 80년대초 옛 소련공산당의 문서를 바탕으로 한 이 기사는 현재의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이 여러차례 런던주재 소련대사관을 방문해 소련대사와 대화를 나눴으며 여기서 노동당 인사들이 영국의 핵정책을 비난하는 등 소련의 편을 드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공개했다. 또 당시 파업을 주도했던 광산노조 지도자를 키녹이 비난했다는 내용도 이 문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더구나 타임스는 배포 하루전인 2일부터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특종보도를 선전했고 시내의 전광판에는 「공식자료=키녹과 크렘린의 관계」라는 제목을 내걸어 대단한 비밀을 캐낸양 홍보를 했다.
이 기사가 보도되자 보수당과 노동당의 주요간부들은 언론을 통해 뜨거운 설전을 시작했다. 보수당의 크리스 패튼 당의장은 『이 기사를 통해 키녹의 판단력에 의문이 제기됐다』고 꼬집었고 한 각료는 『소련에 대한 비굴하고도 사대주의적인 태도가 드러났다』고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노동당 인사들은 『보수당이 금세기들어 가장 추잡한 선거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고 반격했다.
문제가 된 기사는 얼핏 보기에는 공식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보도인 것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선데이 타임스의 편집책임자는 전광판의 광고문안은 지나친 느낌이 있다고 사과하면서도 기사내용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공정보도라고 옹호했다. 하지만 앞뒤 맥락 등을 살펴볼 때 타임스의 기사는 보수당을 지지하는 기본노선에 입각해 노동당 지도부에 상처를 입히려 한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자료는 BBC의 소련특파원을 지낸 바 있는 팀 세바스찬이 옛 소련공산당에서 입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세바스찬은 1월말 BBC보도국과 기획프로그램 담당자를 만나 기사화를 요청했으나 BBC측은 기사거리가 못된다며 자료를 되돌려줬다.
BBC 등의 관계자들이 대화내용에 특별히 새로운 알맹이가 없으며 노동당 간부들과의 대화록만을 공개할 경우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기사화를 거부한 점을 감안하면 타임스의 판단은 특정정당의 편에 선 편파적인 것이란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타임스가 기사를 처리한 방식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타임스는 주변정황에 관한 설명은 전혀 없이 노동당 지도부가 여러차례 소련대사관을 방문했고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84년 무렵에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스스럼없이 했다는데 초점을 맞췄다. 타임스만을 보는 독자라면 키녹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세와 입장에 의문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영소련대사였던 포포프는 자신이 재임시절 노동당뿐 아니라 보수당 지도부도 여러차례 만나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는 기본임무라고 말했다. 메이저 총리도 이같은 만남은 관례이므로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문제가 된 발언내용도 신빙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KGB의 영국총책으로 이중첩자로 일하다 영국에 망명한 올레그 고르디예프스키는 『키녹이 여러차례 소련대사관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발언을 한 기억은 없다』고 밝혔다. 또 『외교관들이 본국에 보고하는 대화록은 주재국정계에 대한 대사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크렘린 당국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느정도 윤색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해 키녹을 지원했다.
타임스의 공정성을 가장한 편파보도와 일부 보수당 정치인들의 맞장구,격노한 노동당 간부들의 역공세로 이 사건은 영국정계의 최대쟁점으로 떠올랐다. 메이저 총리는 인신공격성 논쟁을 중지하고 떳떳한 정책대결을 벌이자고 밝히고 당사자인 키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타임스가 일으킨 파문은 쉽게 가라앉을 것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타임스의 의도대로 키녹과 노동당에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2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최고의 권위지로 꼽히던 더 타임스지 자신에 더 큰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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