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계급제도” 일부서 비판/보수적 분위기에 여론은 잠잠【런던=원인성특파원】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자처하는 영국은 의외로 서구선진국 중에는 계급제도가 가장 뿌리깊게 남아있는 사회로 꼽힌다. 중동의 왕정국가나 인도의 카스트제도 등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지만 영국의 귀족계급은 신분과 유산의 이점뿐 아니라 각종 사회활동에서도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런 영국사회에서 최근의 조그마한 사건을 계기로 계급구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물의를 빚곤했던 한 귀족이 필리핀에서 낳은 자식이 친자확인 판결을 받음으로써 귀족신분을 세습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모이니한 경(로드)이라는 방탕한 인물이다. 지난해 11월 55세로 마닐라에서 숨진 그는 마약복용과 탈세 등의 혐의를 받자 영국을 떠나 지난 72년부터 마닐라에 눌러 살아왔다. 그는 여기서 여러개의 마사지팔러와 술집 등을 경영해왔다.
모이니한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그것도 귀족의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플레이보이 행각을 일삼아온 그는 무려 다섯번의 결혼 기록을 갖고 있다. 결혼상대자들의 신분은 모이니한을 더욱 구설수에 오르게 했다. 첫번째 부인은 배우겸 누드모델이었고 두번째 부인은 댄서출신이었다. 나머지 셋은 모두 필리핀 여자였는데 마지막 부인인 올해 26세의 지나 사비아가는 호텔프런트에서 일하다 모이니한을 만났다.
사비아가는 모이니한이 죽은 10달 뒤 아들 다니엘의 친자 확인소송을 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다니엘은 자동적으로 귀족의 신분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지난 28일 아들을 안고 영국에 온 사비아가는 『영국 귀족사회가 아무리 푸대접을 하더라도 다니엘을 철저하게 영국귀족으로 교육시켜 상원인 귀족회의에 진출하게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품위를 잃은 한 귀족이 외국땅에서 낳은 혼혈아가 하루아침에 이러한 특권계층에 편입되게 되자 많은 영국인들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귀족세습제도의 맹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인디펜던트지는 사설을 통해 『외국에서 보면 영국이라는 나라는 참 이상한 사회로 비칠 것』이라며 냉소적인 논조를 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영국인들로 하여금 계급사회의 허구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는 되었지만 귀족제도의 철폐 등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국언론들이 논평을 꺼리고 있는 점이나 유일하게 이 문제를 사설로 다룬 인디펜던트지의 경우에도 왕정이나 귀족제도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변죽을 울리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한 것을 보더라도 계급사회를 보는 영국인들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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