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들 「경무대 줄잡기」 경쟁/이 대통령 은행보유불은 직접 통제/「치부직통 코스」… 수단방법 안가려/배정불로 물자수입 또 “돈방석” 재계판도 큰 영향해외에서 물건을 사오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전쟁중이던 50년대초에 달러가 흔할 리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역회사가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직접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 이외에 중석달러·종교달러·암달러·원조불 등이 있었다. 중석달러는 전략물자인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외화인데,이 돈은 기계류·선박·화물자동차 등 산업 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쓸 수 있었다. 중석달러는 중석수출을 맡고 있던 대한중석이 직접 수입할 때 사용했으나 극히 제한된 무역회사에 특혜불로 배당되기도 했다.
암달러로 유통된 시중달러는 주로 주한 미군들로부터 흘러나왔는데 환율도 높고 거래량도 적어 수입자금으로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종교달러 역시 그림의 떡이었다. 종교달러는 기독교 선교·전시구호·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송금된 외화로 기독교계통과 깊은 관계를 가진 무역상이 아니면 얻어쓸 수 없었다.
이밖에 원조불과 UN군 대여금 상환불이 있었다. 원조불은 전쟁 복구기에 국내 산업의 판도를 결정하는 자금이 됐다. 상환불이란 정부가 UN군에게 국내에서 사용할 돈을 원화로 대여해 주고 그 대전으로 받은 달러인데 당시 국내 부족물자를 수입하는데 긴요하게 쓰였다.
결국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배정했고 자연히 달러를 따려는 기업인들의 로비가 성행했다. 더욱이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의 환율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 달러를 딴다는 것 자체가 치부의 직통코스였다. 정부가 배정하는 달러로 정부가 지정하는 물자를 수입해서 국내에 풀어만 놓으면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의 환율이 비현실적으로 낮게 평가된 원인은 상환불이었다. 원화를 대여해 주고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낮은 환율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환율문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달러라면 벌벌 떨던 이승만대통령에게 환율을 현실화시키자는 건의를 했다가 목이 달아난 장관이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가난에 이골이 난 대통령이었다. 51년 12월15일에는 은행보유불 사용에 대해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져 달러에 관한한 1달러라도 대통령의 결제가 필요했다. 달러에 대한 집착은 프란체스카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해운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다 전쟁중에 일본공사를 지낸 김용주의 회고다.
『50년 7월중순 대전방위선이 흔들릴 때였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이기붕이 전화를 걸어 부산시내에 부상병들이 몰려오고 있으나 약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다면서 약품조달을 요청했다. 당시 주일대표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김진형 부총재에게 요청,동경지점의 정부보유불 1만달러를 풀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어 약품을 구했다. 그러나 달러사용에 대한 재가가 문제였다. 의약품을 급송한 후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대통령의 재가대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정부보유불을 썼느냐는 노기 띤 추궁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정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무대 안팎이 관리하는 달러를 기업인들이 사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정치권에 대한 기업인의 곡예가 시작됐다. 해방후 혼란기에 줄을 잘 잡았던 백낙승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재계 판도는 곧 정부의 달러를 따느냐 못따느냐에 달려있었다. 정부가 실시한 경매에서 달러만 잡으면 돈방석에 앉았으며 그렇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해방후 대권의 향배를 가늠할 수 없던 시기에 벌어졌던 기업인들의 줄잡기 경쟁과 귀속재산 불하전이 정경유착의 1기라면 당시의 로비는 정경유착 2기인 셈이다.
재벌과 정치와의 관계는 이후 전쟁 복구기의 원조불 경쟁과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차관전쟁,각종 정부주도 사업권 획득 등으로 이어져 국내 재벌사의 뚜렷한 특징으로 남는다.
한국의 기업사가 정경유착의 역사로 점철되고 재벌들이 오늘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곡예의 테크닉이 기업의 흥망성쇠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봉쇄적인 가족경영의 형태를 띠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를 놓고 벌어진 정치권과 기업의 관계는 급기야 국내 최초의 대형 경제사건인 중석불 사건을 낳고 말았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