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하차 인파 대신/시장 고객들 “북적”/차고위치엔 대규모 종합시장 들어서/주변 대폿집등 한때 명물로/66년 「역사의 종점」으로 퇴장지난 66년 11월29일 청량리에서 승객 46명을 태운 303호 전차가 동대문 종점에 도착한 뒤 운전사 김병철씨와 차장 고인환씨는 『종점에 다왔습니다. 안녕히들 가십시오』라고 고별인사를 했다.
1899년 이 땅에 첫선을 보인 전차가 67년만에 그야말로 「종점」에 온날이었다. 서울 종로구 종로6가 289의3의 대지 6천여평에 자리잡고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동대문 종합시장 자리는 전차종점이자 차고지였다.
동대문 전차차고의 역사는 전차가 이 땅에 「탄생」한 날부터 시작된다.
19세기말 미국인들이 만든 한성전기회사는 왕실의 특허를 받아 동대문에 화력발전소를 세우고 서대문∼홍릉간에 전선을 잇고 레일을 깔아 전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앞뒤가 없이 「댕」 「댕」 「댕」 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차는 장안의 명물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마포·왕십리선 등이 잇달아 개통되면서 더많은 전력이 필요하게 되자 동대문 발전소는 변전소로 바뀌고 변전소 맞은편에 전차를 세워두고 수리할 수 있는 차고가 들어섰다.
1933년 한전의 전신인 경선전기에 입사해 전차가 없어질때까지 전차의 핸들을 놓지 않은 정복해씨(77·한전전우회 서울남부지부장)는 당시 청계천변과 동대문 등 전차차고 주변의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전차운전사·차장·관리보수요원들은 새벽 배차시간에 맞추기가 힘들어 아예 동대문 근처에서 합숙하거나 셋방을 얻어 살았다.
이들을 고객으로 한 이발소 음식점 등이 속속 생겨났고 대폿집도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주인이 말을 더듬어 「떼떼네집」으로 통한 「홍수옥」이란 대폿집은 외상 잘주기로 유명했다. 전차는 동대문 종점을 중심으로 청량리 왕십리 돈암동 원효로 마포방면으로 이른 새벽부터 통금직전까지 왕복했다. 청량리 종점에 모이는 곡물,왕십리의 야채,마포의 새우젓 등이 시내로 반입되는 수단도 전차가 큰 몫을 했다. 광복절 등 국경일이나 창경원에서 벚꽃놀이가 열릴때면 꽃으로 장식한 꽃전차가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전차중에서도 꽃전차를 타려면 수십미터씩 줄을 서야했다.
전차의 양옆이 트여있는 단차가 커브길을 느리게 지나가면 젊은이들이 전차에 뛰어들어 차장을 놀라게 하기 일쑤였고 아현동 굴다리위에서 돌멩이를 줄어 달아 늘어뜨려 전차장유리를 박살내기도 했다.
호기심많은 어린이들은 전차레일위에 대못 등 쇠붙이를 올려놓아 납작하게 만들기를 즐겨했다.
50년대말부터는 일본제 전차와 함께 미국이 원조한 성능좋은 전차가 들어와 대중교통수단으로 큰몫을 했다.
10년간 전차로 출퇴근한 회사원 하갑란씨(52·여·서울 도봉구 도봉동)는 『전차는 버스에 비해 느리고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소달구지같은 은근하고 넉넉한 매력을 갖고있던 서민의 발이었다』며 『TV 등에서 외국의 무궤도 전차를 보면 옛날 생각이 저절로 난다』고 말했다.
지난 66년까지 하루 50여만명을 실어나르던 2백70여대의 서울 전차는 승용차의 증가와 도시계획 등에 밀려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69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청계천복개,3·1고가도로건설 등에 예산이 달리자 한전 차고자리를 불하하기로 했다.
현재 동대문 종합시장 회장인 정시봉씨(76)가 17억원을 일시불로 내고 전차종점부지를 사들여 시장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사람들이 모여들던 동대문 전차종점자리에는 이렇게해서 작은 도시 규모의 맘모스 시장빌딩이 들어서 오늘도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이은호기자>이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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