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 2백14m 국내유일 도개교/고단한 삶에 지친 투신자 많아 경고팻말도/교통량폭주 개통 32년만에 상판고정시켜부산 영도다리는 용두산 오륙도 등과 함께 항도 부산의 상징이자 6·25때 피란민의 애환이 짙게 서린 곳이다.
지금은 다리상판이 고정돼있어 여느 다리와 다를바 없지만 개통후 지난 66년까지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도개교로 하루에 여러차례 다리상판을 들어 올리는 명물이었다.
전화를 피해 부산까지 내려온 피란민들은 영도다리를 오가며 헤어진 가족과의 상봉을 기약없이 꿈꿨다.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광복동 등에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피란민들은 판잣집을 찾아가기 위해 영도다리를 지나며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떳다」는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를 눈물속에 불렀다.
영도 다리에서 막막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다리위 아래에는 경찰관이 24시간 고정배치돼 투신자살을 예방했으며,철제난간에는 「잠깐만 다시 생각해봅시다」 「생명은 하나뿐」이라는 빨간색 페인트의 팻말이 붙어있었다.
영도다리가 개통된때는 58년전인 1934년11월23일.
부산의 남·북항이 매립돼 하역능력이 크게 늘어나고 지금의 중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확장이 절실해지자 당시 부산부는 영도까지 다리를 놓게됐다.
그러나 해운업자등의 반대가 만만치않았다. 해운업자들은 다리를 놓기위해 바다를 메우면 물길이 좁아지고 물살이 세어져 작은 배들은 교각에 부딪칠 우려가 있으며 1천톤 이상의 큰배는 다리밑을 빠져 나갈 수 없어 비경제적이라고 반발했다.
부산부는 다리일부분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설계를 고쳐 당시 3백60만원의 거금을 들여 착공했다. 당시 나룻배삯이 1전이었으므로 얼마나 큰 공사였나를 알 수 있다. 영도다리가 개통되자 구경꾼들로 매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기록에 의하며 개통당일에는 김해 양산 밀양 창원 등지에서도 구경꾼이 몰려와 6만여명이 다리가 치솟는 장관에 환호를 보냈다.
부산부의 상주인구가 16만여명에 불과하던 시절이니 인파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부산우편국과 영도우편소는 축제분위기속에 「부산 도진교 준공기념」이란 글자와 함께 상판이 올라간 다리그림의 특별 우편소인을 우편물에 찍었다. 이로 미루어 영도 다리는 개통당시에는 도진교로 명명됐음을 알 수 있다.
영도다리의 전장은 2백14.63m로 부산대교동쪽 31.30m의 다리한쪽이 올라가면 통통배들이 줄을 이어 통과했다. 상오 3회(6·8·10시)와 하오 4회(1·3·5·7시)씩 요란한 사이렌소리와 함께 전기의 힘으로 올라갔다.
1일7차례나 20분씩 상판을 들어올리다보니 교통소통에 지장을 주게돼 얼마뒤부터 1일2회10분씩으로 횟수와 시간을 줄였다.
영도인구가 크게 늘어 뭍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상수도 송수관이 이 다리를 통해 연결되고 교통량이 폭주하자 개통 32년만인 1966년 9월1일부터 고정돼 버렸다.
흥남이 고향인 박순식씨(72·부산서구 서대신동 3가 1157)는 6·25피란길에 가족 4명과 뿔뿔이 헤어졌다가 53년 7월 영도다리위에서 극적으로 재회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을 가눌수 없다.
박씨는 『영도다리야 말로 우리가족에게는 고향같은 곳』이라고 회상에 젖었다.
전직경찰관 김무웅씨(66)는 『날이 밝으면 다리위에 투신자살한 사람의 고무신과 보따리가 여러개 놓여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사이렌이 울리면 다리절단 부분에 멈춰서서 치켜올라간 다리한쪽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영도다리위에 지금은 자동차만이 꼬리를 잇고있지만 부산을 다시 찾는 피란민들에게는 당시의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부산=최연안기자>부산=최연안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