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부산물이 「달러박스」 변모/업자들 「전담반」조직 방방곡곡 수집/획득달러로 물자수입 “2중 돈벌이”/이병철 51년 한해 3억원으로 51억 벌기도고철의 대일수출 문제는 이승만대통령의 완강한 고집으로 6차례에 걸친 국무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미국에 수출하는 것보다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일부 각료들의 설득과 무역업자들의 끈질긴 해제요청도 그의 배일감정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대일 고철 수출금지로 문제가 발생했다. 51년 2월 초순 동경에서 한일 통상회담이 열렸는데,한국은 전쟁에 소요되는 군사물자와 민생물자 거의 전량을 일본으로부터 긴급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따라서 한일간 통상협정이 필요했다. 주일공사 김용주를 수석대표로 상공부차관 이병호,재무부 이재국장 송인상,한은부총재 김진형 등이 통상협상위원으로 참가했다.
전후 일본점령 연합국 사령부(일명 맥아더사령부,SCAP)의 주재아래 열린 이 회담은 개회벽두에서 막혔다. 스캡의 해외통상 과장은 『한국은 대일 고철수출을 막고 있는데 한국이 계속 이를 고집한다면 이 회담은 의미가 없다. 한국의 대공전에 소요되는 군수물자는 일본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주요원료인 고철을 한국이 수출하지 않으니 미국의 대공전이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수가 없었다. 물자부족에 허덕이던 정부는 고철 대일수출을 허용하고 특별외화 대부,외환선대,외화증서 대부제 등 수입촉진책을 써가면서 수입을 장려했다. 전쟁초기 군사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미국의 주장으로 매매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채 일본의 보세창고에 쌓아두었던 수출품의 대상수입도 시작됐다.
정부의 본격적인 수입정책으로 제철을 만나 무역업자들은 너도나도 고철과 탄피수집에 나섰다. 삼성의 이병철과 동업하고 있던 조홍제는 정부의 고철 수출재개에 맞춰 고철수집반을 만들었다. 반장은 동생인 조성제였다. 『정부는 고철수집을 지원하기 위해 은행융자까지 실시했다. 당시의 기본화폐는 10원짜리였고 고철수집을 위해 가져가야 할 돈의 부피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큰 걱정거리였다. 궁리끝에 생각해낸 것이 돈으로 베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베개를 기차간에서 베고 자기도 하고 안고 자기도 했다. 아직 포성이 울리고 있는 서울에 와서는 숙소에 베개를 풀어놓고 고철수집에 나섰다』고 삼성의 고철수집 반장이었던 조성제는 회고한다.
전선이 밀고 밀리는 혼란속에서 고철을 수집한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건 것이었으나 더 큰 어려움은 수집해 온 고철을 저울로 다는 일이었다. 분명 1백톤을 샀는데 다시 달아보면 40톤 밖에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고철수집상들에게 고철은 고철이 아니라 고철이었다. 그러나 고철은 수집하는 순간 기만달러가 수중에 들어오니 어려움을 탓할 계제가 아니었다. 고철로 벌어들인 달러로 국내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수입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탄피로 가공한 목걸이 팔찌 재떨이 등도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당시 중건실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무역업에 참여했던 알파소닉의 김병환회장은 『흔한 것이 탄피였고 피란민들이 대거 몰려 값싼 노동력으로 탄피가공이 가능했다. 홍콩 등지에서는 한국의 탄피공예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말한다.
정부가 수출을 적극 장려한 이후 수출액이 급격히 늘었다. 당시의 수출품은 고철과 탄피를 비롯,해태,중석,면실 등이었다. 51년의 수출액은 고철 4백18만달러를 포함,총 1천6백만달러였고 52년에는 2천7백만달러로 크게 늘었다. 52년 3월 한미 중석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석의 수출이 늘었던 것이다. 53년에는 쌀이 부족한데도 정부는 쌀 1백만석 수출을 추진했다.
무역업에 참여하고 있던 기업인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고철을 수출하고 설탕 등을 수입한 삼성의 이병철은 51년 한해동안 3억원의 밑천으로 51억원의 이익을 냈다. 무역협회도 활기를 띠었다. 일본 동경에 지부까지 설치했다.
52년 3월 당시 무역협회 회원은 88명이었다. 합일기업의 이활이 회장이었고 부회장은 미 군정시절 상무부장(지금의 상공부장관)이었던 오정수였다. 이밖에 회원으로는 김용성(대한물산),김인형(동아상사),설경동(대한산업),전택□(천우사),안동원(상호무역).서선하(삼광실업),송대순(대신상사),김연수(삼양사),신영균(영화물산),백낙승(대한문화선전사),이연재(미진상회),주요한(삼흥실업),김지태(삼화상사),이병철(삼성물산),김병환(중건실업),심상준(대원기업),이정림(개풍상사),전용순(금강무역),김광균(건설실업) 등이었다.
이들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달러였다. 오늘날 기업인들이 땅을 찾듯 당시의 기업인들은 달러를 찾아 분주히 뛰었다. 달러가 있어야 수입이 가능했고 수입은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달러는 정부의 뒷심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달러배정은 곧 특혜였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