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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업활동(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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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업활동(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19)

입력
1992.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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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기업인들 부산서도 「실력발휘」/제조업시설 초토화로 무역업 집중/이병철 설탕·설경동 중석으로 “떼돈”/부산 기반 구인회는 플라스틱제품 생산 거액 벌어6·25는 전국의 각종 생산시설을 초토화시켰다. 남은 곳이라고는 부산뿐이었다. 정부는 1·4후퇴 이후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정했고 기업인들도 활동무대를 부산으로 옮겼다.

『6월26일에 벌써 서울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27일에는 묵호방면의 피란군중이 밀어닥쳤다. 기습작전으로 계속 남하한 괴뢰군들은 서부를 우회하여 7월말에는 하동을 거쳐 함안과 창령까지 쳐들어왔다. 동부전선인 포항지구와 서부경남에서 후퇴한 국군사병은 일반 피란민과 뒤범벅이 되어 패잔병의 비참한 물결이 부산시내를 메웠다. 이 와중에서 경향각지의 기업인들도 부산으로 몰려들어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었다』 당시 부산에서 삼화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려놓고 무역협회 부산지부장을 맡고 있던 김지태의 회고다.

전비조달을 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전시 인플레를 심화시켜 천정부지로 물가가 폭등했다. 1947년에 비해 물가지수는 51년에 22배,52년에는 48배로 치솟았다. 49년 9.7%의 성장률을 기록했던 한국경제는 50년 마이너스 15.1%로 급강하했고,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51년에도 마이너스 6.1%를 기록했다. 기업활동은 자연히 생산활동 보다는 단시일내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무역업에 집중됐다.

부산에 모여든 기업인들은 너도나도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서울에서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등으로 한밑천을 잡고 있던 기업인들은 그 실력을 피란수도 부산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구로 피란했던 삼성의 이병철은 50년 12월15일 부산에 내려와 다시 삼성물산 주식회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삼성이 명맥을 이었다. 『간판을 걸기는 했으나 전시중이어서 수출은 엄두를 못냈고 수입도 외화 확보가 어려워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6·25이전부터 거래하던 홍콩의 에이전트에 다시 수출을 재개하겠다는 연락을 취하면서 동락직전에 선적했던 3만달러 상당의 면실박 수출미수금에 대해 문의했다. 홍콩의 무역상은 즉시 면실박 현품은 영국인 바이어에게 도착되고 수출대금은 회수되어 보관하고 있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송금해 주겠노라도 회신해왔다. 당시 돈으로 3만달러는 거액이었다. 국내에서는 설탕과 비료가 절대 부족하였다. 이 돈으로 설탕을 수입했다』 이병철은 부산시대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는 수입한 설탕 전량을 국제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동양의 이양구에게 넘겼다. 이병철과 이양구는 서울에서부터 서로 거래를 트고 지내던 사이였다.

전시경기를 타고 뜻하지 않던 횡재를 한 무역업자들도 있었다. 6·25가 터질 무렵 부산항에는 수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엔군은 이 물건들이 군사작전에 방해가 된다 해서 모두 옮겨가라고명령했다. 할 수 없이 야적됐던 수출품들은 매매계약도 체결하지 않은 채 우선 가까운 일본으로 가 수출되어 일본의 보세창고로 옮겨졌다. 이와같은 보세창고 위탁제는 50년 7월부터 51년 5월까지 11개월이나 걸렸다. 이때 가수출되어 일본 보세창고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한국상품이 전쟁경기를 탔던 것이다.

판로가 없어 노적돼 있던 중석이 시세를 만나 전란전 4백달러에도 못미치던 가격이 4천달러를 호가했다. 소림광업으로부터 반 억지로 대량의 중석을 떠 맡았던 대한산업의 설경동은 갑자기 떼돈을 벌었다. 철광석의 매기도 왕성하게 살아나 동아상사의 이한원도 횡재를 했다. 남선무역의 김원규는 해태수출로 무역업계에 부상했다.

서울에서 몰려온 기업인들이 이처럼 무역업으로 재기를 노리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일찍 부산에 둥우리를 틀었던 기업인들은 전란전과 다름없는 기업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역업을 하던 사람은 무역으로 더 큰 돈을 벌었고 제조업을 하고 있던 기업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제조업을 버리지 않고 지켰다.

6·25이전에 화장품을 만들어 큰 재미를 보고 있던 낙희화학 구인회의 제조업에 대한 집념은 전란중 오히려 더 큰 전기를 맞았다. 『모두들 무역업에 뛰어들었으나 무역업에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화장품제조업이 그만큼 바빴기 때문이었다. 51년 8월에는 그동안 벌어들인 3억원을 몽땅 플라스틱 공장에 투자했다.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심정이었다』 구인회의 후일담이다. 당시 그에게는 「깨지지않는 화장품 뚜껑」이 최대 관심사였는데,플라스틱기계를 입수한 그는 당시 국내에서 크게 부족하던 각종 상품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먼저 머리빗는 빗을 만들었다. 「오리엔탈」 상표를 박은 빗은 불티난 듯 팔렸다. 52년 11월에는 공장을 확장하고 칫솔 식기류 등을 생산했다. 전시 경기속에 그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무렵 삼성의 이병철이 구인회에게 『2억원을 낼테니 원당수입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구인회는 『나는 공업을 할테니 당신은 무역업을 하시오』라는 말로 거절했다. 만약 그들이 그때 손을 잡고 일을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후일 그들은 사돈간이 되었고 동양방송을 함께 시작했으나 결국 갈라섰다. 서로의 경영스타일이 달랐던 것이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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