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 결정 의회열었던 건물 개조/나치 잔학성 폭로 기록물·사진 전시/후손들 역사교육장으로 활용 계획【베를린=강병태특파원】 나치독일이 유태인 학살계획을 결정했던 회의장소에 50년만에 「학살기념관」이 들어섰다.
유태인들은 물론 독일민족에게도 악몽처럼 기억되고 있는 「반제(Wannsee)회의」 50주년을 하루 앞둔 19일 서베를린 남쪽 반제호수가에 있는 반제 빌라에 개관한 이 기념관은 통일독일 최초의 유태인 학살기념관이란 의의를 갖는다. 과거 동독쪽에는 나치 학살유태인을 추모하는 기념물들이 있었으나 서독에는 없었다. 서베를린시는 오랜 논란끝에 지난 89년 유태인추모비 대신 유태박물관을 설치키로 했었으나 지난해 이 계획을 취소,거센 비난을 불러 일으켰었다.
유태인 학살기념관이 마련된 반제 빌라와 1월20일은 독일민족과 유태인들에게는 악연의 장소이자 영원히 기억되는 날이다.
제정시대의 저택인 반제 빌라에서는 42년 1월20일 나치의 비밀경찰총책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전유럽의 유태인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정부 각 부처실무국장급과 나치 친위대 주요지휘관들이 참석한 이 반제회의는 공식기록으로는 『유럽전역의 유태인 1천1백만명을 집단 소개시켜 적절히 처리한다』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이 반제회의의 결정은 실제 이미 41년말부터 진행해 오던 유태인들의 집단수용 조치를 확대,조직적 말살정책을 확정한 것이었다. 하이드리히의 직속부하로 이 회의 기록작성을 맡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후일 이스라엘법정에서 『참석자들은 집단 수용소에서의 학살기술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찬사와 함께 코냑잔을 권했다』고 진술했다.
이 반제회의에 대해 베를린시 정부는 기념관설치 제안문에서 『독일의 전국가조직이 나치 친위대의 공범이 돼 유태인 학살의 도구로 전락한 역사적 순간』이라고 규정했다.
베를린시 당국은 이 쓰라린 과거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악연이 얽힌 반제빌라를 기념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념관에는 나치역사와 반제회의의 결과,즉 유태인 학살에 관한 기록과 사진만을 전시키로 했다. 이 기록들은 어떤 다른 기념물보다 감정과 이성을 초월하는 역사적 증명력을 갖는다는 이유에서다.
이같은 기념관 장소선택과 그 형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반제 빌라는 베를린 외곽의 한적한 호수가에 위치,그동안 버려져 있다시피한 곳이다. 건물외관도 평범한 3층 저택이다. 반면 지난해 베를린당국이 신축계획을 취소한 유태박물관은 당초 베를린중심부인 장벽부근이 후보지였다. 또 채택됐던 설계에 의하면 건물외형부터가 부서진 유태별표지를 연상시키는 등 강력한 메시지를 갖는 유태인 학살추모비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었다. 이 때문에 베를린시 당국이 통일후 이 유태박물관 신축계획을 취소한 것은 표면적인 재정부족 이유에도 불구하고 통일수도의 심장부에 나치과거를 회상시키는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않은 「정치적 고려」 때문이란 비난을 낳았었다.
그러나 어쨌든 19일 반제 빌라에서 열린 기념관 개관행사에는 쥐스무스 연방의회 의장과 디프겐 베를린시장 그리고 갈린스키 독일유태인중앙평의회 의장 등이 참석,『나치죄악을 잊어서는 안되며 기념관은 독일국민의 미래를 향한 약속의 상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념관 관리를 맡을 재단도 「미래를 위한 기억」으로 이름붙여졌다.
한편 콜 독일총리도 반제회의 50주년을 맞아 특별성명을 발표,나치의 광적인 인종주의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촉구하면서 『독일역사의 가장 암울한 부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콜 총리는 특히 이같은 어두운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자유와 평화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슈피겔지도 이 기념관의 의의를 『극우과격세력이 점증하는 격변기 속에서 소수민족들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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