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여름. 그 해는 유난히도 비가 많았다. 비를 거느린 바람이 미친듯 휘몰려 가고 밤새 내리고 나면 잠자던 계곡에는 물살에 떠내려 가는 바위들의 소리가 요란했다. 지나고나면 밋밋한 바위틈새로 실같은 폭포가 생겨나고,떨어진 복숭아나 자두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다음해로 예정된 인도 성지의 도보 순례를 떠나기에 앞서 그 여름은 뜨거운 날의 체력단련기로 정하고 있었다. 엄격한 큰 절의 대중생활에서 잠시 떨어져 산 너머 초막같은 암자에서 주리면 먹고 곤하면 자고 낮에는 걷고 밤에는 읽고 쓰는 것을 치열하게 되풀이해 치러내고 있었다.오전 열한시에 점심을 대강 해먹고 얇은 러닝과 짧은 바지 하나 입고 모자쓰지 않고 지팡이 하나 들고 8㎞의 등산길을 나선다. 가능하면 몸을 노출시켰기 때문에 무성한 억새풀 지대를 통과하거나 가시덤불을 헤치다 보면 온 몸이 지네자국같이 할퀴어 꼴이 말이 아니다. 길로는 가지 않는다는 내부규약 때문에 자연 길은 험하게 되어 있고,갔던 길을 가지 않기 때문에 늘 낯선 길이다. 목표했던 곳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면 오후3시. 가장 뜨거운 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 앉아서 견디는 더위쯤 대수로울게 없다. 인도의 더위를 견디기 위한 일종의 준비였는데 나는 이것을 더위로 더위를 다스리는 산보 길(이열치열산보행)이라고 이름했다. 그것을 문앞에 써붙이고 암자를 나서곤 했는데 비가 오나 안개가 끼거나 이 짓은 매일 계속되었다.
돌이키건대 매우 자유스러운 생활이었다. 전기가 없으니 촛불을 켰고,불상이 없으니 불공이 있을 리 없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니 걸릴 것이 없었다. 실제로 도반을 찾아 길을 나서면 암자는 몇날이고 며칠이고 무주공산이었다.
그렇게 지내며 여름이 다 갈 무렵 석양 어느날,큰 절 넘어다니는 오솔길 말고 마을에서 올라오는 큰 길로 스님 두어분 타고 털털거리며 경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낙조가 좋을 때는 음력 초열흘 삼태성이 희미해질 무렵 한밤의 모추산에 걸린 달의 경치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황홀한 것이기에 나는 석양노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손뼘만한 마당에 경운기가 멎었다. 젊은 스님들을 동반하고 스승은 거기 내리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시더니 젊은 스님들에게 작업지시를 내리셨다. 미리 작전구상이 완료된 듯 젊은 스님들과 손발이 척척 맞았다. 대장경과 읽어치웠던 책들이 순식간에 실려 떠났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남은 책과 승방의 도구를 싣기위해 경운기는 한번 더 왕복했다. 그리고 혼자 덩그라니 암자에 남겨두고 그들은 떠났다. 3단을 넣고 내려가는 경운기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기도 했지만,스승은 경운기에 앉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여기 너무 오래있구나』 그 한마디 뿐 오너라 가거라 말씀은 없으셨다. 새벽 모추산의 달이 아쉬웠지만 어두워진 산길 큰 절로 돌아오며 마음이 하도 넉넉해지고 깊어져 사람으로 태어나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것을 주절주절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저 유명한 선객 임제의 젊은 시절,결제중에 책을 보는 스승 황벽이 유치해져 살림중이지만 걸망챙겨 떠나다가 다시 돌아와 황벽에게 뺨을 세번이나 맞고 황벽의 지시로 고안 나루터 대우를 찾아갔다 돌아온 뒤 죽음을 앞에 두고 탄식했던 말,『아∼아. 뉘 있어 나에게 회초리를 들어줄 것인가. 스승의 일 생각하면 오늘도 입가에 향기가 솟는구나』라며 스승을 사모했다더니.
부처님은 스스로를 좋은 벗(선우)이라고 부르도록 하셨다. 그러나 누구도 부처님을 『좋은 벗이여』라고 부르지 않았다.
스승은 한번도 가르침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스승을 떠나 본 일이 없다. 요즈음처럼 멀리 있어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 해 여름이 그립다. 가시덩쿨 억새풀에 온 몸이 찔릴지라도 그 여름의 향기가 이 산의 겨울까지 그윽히 감싸고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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