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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당여관/4백여 대국 열린 바둑인의 고향(그때 그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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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당여관/4백여 대국 열린 바둑인의 고향(그때 그자리)

입력
1992.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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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어린 한옥서 기객 묘수심취/89년 헐린자리 오피스텔 들어서/아마기사 정치인 윤길중씨등도 단골매미소리 요란한 한여름,전통한옥의 우아한 처마아래 하얀 창호지를 바른 방문이 열려있고 방안에는 2명의 프로바둑기사가 바둑판 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기사들의 목덜미엔 땀방울이 맺히고 옆방에서 대국을 지켜보는 기객들은 수읽기가 한창이다. 한점 바람은 기사들의 마음을 아는지 흑백의 바둑돌을 가만히 스쳐간다.

「그때 그자리」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기원에서 만난 시인이자 아마기사인 박모씨(47)는 89년 2월까지 서울 종로구 운리동 65의1에 있던 운당여관을 이렇게 떠올렸다.

바둑과 한옥의 절묘한 조화로 상징되던 운당여관은 59년 국수전 도전기부터 89년 조훈현­장수영 프로간의 박카스배 결승까지 4백여회의 각종 프로바둑 대국이 열린곳으로 유명하다. 또 방값이 호텔보다 훨씬 싸면서도 고풍스런 한옥의 분위기가 조용하고,정성껏 손님을 모셔 외국관광객들도 즐겨 찾았다.

덕성여대 남쪽담을 끼고 들어가는 좁은 골목과 삼환기업빌딩 오른쪽으로 나있는 길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던 운당여관 자리에는 10층짜리 세원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31년 동안 여관을 운영해온 사람은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국악인 박귀희씨(본명 오주화·71)이다. 박씨는 51년 거부 박흥식씨의 조카 박병교씨로부터 산 현재의 운리동 한옥에서 살면서 창극단 「해님 달님」을 꾸려나갔다.

창극단의 흥행이 6·25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자 박씨는 구한말 세도가였던 한상억 소유인 이웃 한옥을 사들여 58년부터 여관을 시작했다. 60년초에는 인근 가옥 3채를 사서 허물고 정릉에 있던 윤비(순종의 비) 별장의 재목과 기와를 옮겨와 여관을 확장,4백50여평에 온돌방 31개를 갖췄다. 이때 지어진 신관의 청실·홍실·황실 등 세개의 특실이 바둑대국장으로 애용되던 방이다. 이곳에서 조훈현 조남철 김인 등 기라성같은 프로기사들이 국수와 명인 등의 타이틀을 뺏고 빼앗겼다. 노영하 8단은 『윤기현 9단이 김인 9단에게서 국수타이틀을 빼앗은 곳도,하찬석 8단이 윤 9단의 타이틀을 물려받은 곳도 운당여관 특실이었다』며 특히 자신은 『72년 윤 9단과의 국수전 결승에서 2대 3으로 분패한 아픈 기억이 스민 곳』이라고 회고했다.

프로기사들의 대국이 있는 날이면 수많은 바둑애호가들이 몰려 한수한수를 숨죽이고 지켜봤다.

아마 6단 허윤씨(56·전 국가대표)는 『한옥의 정취속에 바둑의 묘수에 심취하던 당시가 그립다』면서 『관전자들의 대실료는 을지로3가에 있던 「조선옥」 주인으로 얼마전 캐나다로 이민간 김정학씨(55·캐나다 한국기원 고문)가 도맡아 내곤 했다』고 말했다.

운당여관을 자주 찾던 아마기사들 중에는 정치인들도 많았다. 윤길중 민자당 고문,윤제술 전 국회부의장(91년 작고),최영근 민주당 고문 등도 단골이었다.

바둑인의 「마음의 고향」인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89년 2월. 주인 이씨는 55년 자신이 서울 돈암동에서 설립한 민족예술학원을 모체로 발전한 국악예술고등학교가 시설이 노후해 발전이 정체되고 있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다 당시 시가 16억원짜리 여관을 학교에 기증했다. 국악예술고등학교는 여관을 팔아 경기 시흥에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교사도 신축했다.

운당여관은 89년 당시 특실 숙박료는 하루에 1만3천원,보통객실은 8천원으로 다른 여관에 비해 쌌고 주택가라서 조용해 미국 일본 등 외국관광객들도 많이 투숙했다. 여관 내실로 사용하던 한옥에서 살고 있는 박씨 집에는 요즘도 여관철거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 단골들로부터 숙박료를 동봉한 예약편지가 배달되고 있다. 박씨는 이들에게 돈과 함께 답장을 반드시 보내준다.

운당여관은 여느 한옥과 달리 조선양반집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운니동에서만 30년을 살고 있는 송재익씨(69)는 『우리 동네의 문화재급 운당여관이 없어져 서운했다』고 아쉬워했다.

박귀희씨는 과거 운당이 보고 싶으면 헐리기전 녹화비디오를 보며 여관시절을 회상한다.<이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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