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평 공간 낭만·철학·정의 넘실/음악회·시화전도 “문화 사랑방”/문단데뷔 김지하씨 연락처로 삼기도4·19이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캠퍼스를 다닌 서울대생이라면 누구나 학교앞에 있던 「학림다방」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문리대 축제인 「학림제」가 이 다방의 이름을 따올 정도였으니 학림다방이 서울대인들에게 차지했던 비중을 가늠해볼 수 있다. 서울대 의대옆 허름한 목조건물 2층,나무결이 거칠게 드러난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심하게 삐걱거렸고 큰 차가 지나가면 다방 바닥이 흔들을 정도였다.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등이 차지한 벽 한켠에는 오래된 피아노 한대가 있었다. 이 피아노는 음대 여학생의 섬세한 손길을 받을때나 술취한 휴가병이 투박하게 두들길때나 언제나 똑같은 울림으로 대답했다.
단조로운 내부장식의 20여평 공간에 마련된 50여개의 좌석에서는 항상 젊음의 꿈과 낭만,고뇌와 좌절,시와 음악,커피와 막걸리가 함께 어우러져 넘쳤다. 학생들은 학림에서 움튼 철학과 정의의 사랑이 강의실보다 더 많은 결실을 얻었다해서 「문리대 제25강의실」로 부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처음보는 사이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아무자리에나 걸터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수업시간에 보이지 않는 얼굴도 이곳에 가면 만날 수 있었고 군대갔다 휴가나온 학생들은 맨먼저 학림부터 찾았다.
학림이 문을 연것은 60년 4·19무렵 동숭동에서 치과병원을 하던 여의사 이양숙씨(79·미 샌디에이고 거주)가 병원 바로옆 건물을 사들여 학림을 개업했다. 이씨는 병원일이 바빠 다방 일은 신선희씨(65·여)가 도맡았다.
「학림아줌마」 「학림누나」로 불린 신씨는 「쌍과부집」이나 튀김집에서 한잔한 학생들이 술을 더 사오라고 생떼를 써도 싫은 내색 한번하지 않았다.
통금에 걸린 학생들이 문을 뜯고 들어와 잠을 자도 외상을 갚지않아도 학림아줌마는 눈살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여종업원들도 학생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리며 대화를 즐겼다. 한 아가씨는 미대생과 결혼하기도 했다.
학림은 특히 문학도와 음악도의 사랑방이었다. 시화전과 작품발표회,음악회가 수시로 열렸다. 이곳을 무대로 결성된 서울음악학회(SMA)는 금난새(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임헌정씨(부천 시립교향악단 〃 ) 등 여러 중견음악인을 배출했다.
박태순 김승옥 이덕희 김지하 등의 작가도 학림에서 젊음을 보냈다. 특히 김지하는 문단등단당시 학림다방의 주소를 역락처로 쓸만큼 학림을 사랑했다.
소유주 이씨는 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자 학림을 옮기려했으나 물색한 땅이 공원부지에 묶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대가 떠난뒤 문리대 시절의 향수를 간직하던 학림은 82년 5월 결국 문을 닫게 됐다.
78년 이씨가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강준혁씨(45·공연기획가)가 1·2층을 세내 신씨와 함께 운영했으나 신씨마저 아들을 따라 미국 이민을 갔다. 강씨는 80년 결혼후 학림건물 1층에 신혼살림을 차릴 만큼 학림에 집착했으나 지하철공사로 83년 다방건물은 헐리고 말았다.
공사전 학림의 닫혀진 나무문에는 「보헤미안들이여,이제는 어디서 다시 만날까」라는 애달픈 문구가 나붙었다.
83년 4월 김모씨(52)가 현대식 3층 건물을 지어 2·3층에 학림이란 이름으로 다방을 냈으나 적자가 누적돼 3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다.
현재의 주인인 이충렬씨(37)는 옛 고객을 위해 낙서집을 비치했다. 낙서집에서는 고향처럼 찾아오는 학림다방 시절의 중년들이 남기고간 사연들로 가득하다.
「그때를 회상하며 음악을 듣는다. 세월은 잘 가는구나. 옛자리는 여전하건만…」.<홍희곤기자>홍희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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