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한 노래한 이상화 시작무대/지하철공사 한창인 교통요지 변모/사색 잠겼던 영선못엔 국교 들어서『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안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닿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일제시대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가 1926년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망국의 한을 절규한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애송되고 있다.
상화가 당시 「남의 땅,빼앗긴 들」로 상징한 것은 국권을 잃은 삼천리 한반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때부터 국민의 애송시가 된 이 시의 무대가 현재 대구 남문시장에서 명덕로터리,영선국교에 이르는 남구 일대에 펼쳐져 있던 들녘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죽순시인 구락부의 원로시인 이윤수옹(79)은 『일제의 착취와 압제에 견디다 못한 한국인들이 북간도 등지로 이주하는 것을 바라보던 상화의 눈에는 대구성밖의 황량한 들녘이 남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라며 『상화와 절친했던 고 백만기 시인으로부터 상화가 이 일대를 헤매고 다니다 시상을 가다듬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상화가 망국의 아픔을 안고 거닐었던 대구성 밖에는 남쪽에 교남학교(대륜중고 전신)와 경북여고·영선못만 있었을뿐 나머지는 모두 들녘이었다.
들녘에는 논과 밭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고 특별히 묘자리를 살만한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봉분이 모여 있기도 했다.
청석밭이 많아 땅은 척박했으나 지금의 영남대병원 앞만은 숲이 우거진데다 묘자리가 많아 「여시(여우의 경상도 사투리)골」로 불리기도 했다.
이같은 스산한 들녘 한구석에 있던 영선못 일대에서는 연꽃과 목화꽃이 아름다운 전원풍경을 그려냈다.
상화는 혼자 이 들녘을 산보하거나 영선못 근처 주막에서 고월 이장희·주우 백기만과 함께 자주 어울리며 문학의 세계로 도피하곤 했다.
상화는 1901년 4월 대구 중구 서문로2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가 상화 4세때 타계해 백부 이일우씨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백조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나의 침실로」,「이별을 하느니」 등의 낭만적 성격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던 상화는 1924년을 기점으로 조국의 현실에 눈뜨기 시작,1926년 개벽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를 발표했다. 그가 이같은 저항시를 쓰게 된것은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에 건너갔을때 겪은 관동 대지진 직후의 동포들의 참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본정부가 퍼뜨린 「한국인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있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그 자신도 고초를 겪었으며 동족이 죽창에 찔려 죽는 참담한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상화는 프랑스유학의 꿈을 버리고 귀국,서울에 잠시 머물다 고향의 품에 안겨 「빼앗긴 들에도…」를 썼다.
해방직후까지 보트가 떠다니는 시민 위락시설로 사용되던 영선못터에는 영선국교가 세워졌다. 예전 못자리 근처에는 남대구우체국·YWCA·경북여고·남문시장·대구교대 등이 들어섰고 명덕·영대로터리 등은 교통요지로 변모,자동차와 인파로 항상 메워지고 있다. 특히 명덕로터리 밑으로는 지하철공사가 시작됐다.
상화는 한동안 무절제한 생활과 독립운동을 한 형을 찾아 만주행을 하기도 했으나 36년께 귀향,시상을 다듬었던 들녘에 있던 교남학교에서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이때 상화는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권투부를 창설했고 교가도 지었으나 교가는 민족사상을 고취한다해서 일제가 못부르게 했다.
당시 현재의 남문시장 건너편에 있던 교남학교는 그 뒤 대윤중·고로 개편돼 수성구 수성동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수성구 만촌동에 정착해있다.<대구=이상곤기자>대구=이상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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