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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치헌금 안된다/양건(시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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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치헌금 안된다/양건(시사칼럼)

입력
1992.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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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세분의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정치자금법의 해석·적용에 관한 참으로 놀라운 시사(?)가 있었다. 재벌총수로부터 수백억원의 거금을 받더라도 불우이웃돕기의 뜻으로 주고 받으면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이 그 하나요,야당의 경우에는 여당에 비해 그 수수액이 소액이므로 무방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요,민주화를 위해 쓰는한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또다른 하나다. 이쯤되면 「법치주의」나 「법의 지배」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색해지고 참담해질 수 밖에 없다. 조금 부연하자면,현행 법률에서는 당원의 당비,국고보조금,후원회를 통한 한정된 후원금,선관위를 통한 한정된 기탁금 이외에는 일체의 정치자금 수수가 금지되어 있다.우리사회가 위기에 빠져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나라의 중심이 제바로 서있느냐 하는 것이다.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국제질서에 현명히 대응하는 일도,남북관계를 올바로 이끄는 일도,경제를 다시 되살리는 일도,그리고 사회의 법질서를 바로 잡는 일도 모두 나라의 중심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사회에 과연 정치적 구심점이 바로 잡혀있는가,지난 연말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60%를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정치가 이처럼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장 큰 까닭은 정치인의 도덕성의 실추에 있고,그 밑바닥에는 정치자금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치자금 문제의 심각성은 엄청난 액수가 비생산적으로 쓰여지고 정경유착을 통해 경제를 왜곡시킨다는 점에 그치지 않고,더 나아가 정치불신의 근본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제 정치자금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정치자금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점은 그 비공개성에 있다. 그리고 그 근본해결책이 금융실명제의 실시에 있음은 누차 지적되어 왔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정치자금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의 하나는,과연 기업의 정치헌금을 합법적으로 인정해도 좋으냐 하는 것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에 의하면 기업의 합법적 정치헌금의 방편으로 두가지가 인정되고 있다. 후원회에 대한 후원금과 선관위를 통한 기탁금제도이다. 물론 기업헌금의 큰 덩어리는 음성화되어 있음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지만,기업헌금 자체에 대한 보다 근본적 문제를 묻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시장과는 달리 「정치시장」은 1인 1표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헌금을 인정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1인 1표의 원칙을 깨는 것이 아닌가. 기업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발언권을 갖고,나아가 자연인보다 훨씬 강한 발언권을 지니는 것이 과연 정치적 평등의 원리와 부합될 수 있는 것인가. 더욱이 기업의 자금은 주주들의 경제적 이윤동기에 의해 모인 것이지,주주들이 반드시 기업의 정치적 의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정치헌금은 정치시장에서의 공정경쟁을 해치는 것이며,정치시장에서의 「시장의 실패」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기업헌금이 금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자금의 공급은 당원의 당비,후원자의 개인후원금,그리고 국고보조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옳다.

미국의 연방선거운동법에 따르면,기업을 비롯한 단체의 정치헌금을 금지하고 있으며,다만 정치적 목적으로 별도로 모금된 자금으로부터 일정 한도액을 지원하는 것만이 허용되어 있다. 또 30개 이상의 주에서도 같은 취지의 법률을 두고 있다. 근래 이들 법률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헌적 침해가 아니냐는 논란이 없지 않지만,적어도 기업이나 기업적 성격의 단체에 관한한,정치헌금이나 정치적 목적의 지출을 금지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보는 것이 최근 연방대법원판결의 결론이다. 이웃 일본에서도 최근 정치자금제도 개혁론이 무성한 가운데,기업헌금의 인정 여부가 주요 쟁점의 하나로 제기되고 있다.

자본주의국가의 정치가 지닌 근본문제의 하나는 돈의 힘이 곧 정치적 힘으로 전화되는 것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것이다. 정치를 위해서도 또 경제를 위해서도 기업의 정치헌금 자체가 아예 금지되어야 한다.

온 사회에 만연된 부패의 고리를 끊고 제바른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도 먼저 올바른 정치자금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정치자금제도는 단순히 여·야의 이해차원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한양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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