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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기업활동(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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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기업활동(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17)

입력
1992.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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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사·두산그룹 “부자 3대 간다”/경성방직 모태 70년역사 자랑/삼양사/박승직 상점서 출발 재벌도약/두산/부침 심한 재계사서 3대 걸쳐 기업운영 “모범”부자 3대를 못간다. 오늘날 재벌의 대부분은 창업 당대가 아니면 고작 2대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가 풍상을 겪어왔듯 재계의 별들도 역사의 굴절과 함께 사라지고 새롭게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이후 일찍이 사업에 눈을 돌려 기업가의 길을 3대째 이어오고 있는 그룹들도 있다. 두산과 삼양사다. 이들 두 그룹은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이후의 혼란기,6·25 등을 거치면서 꿋꿋하게 우리 기업사의 맥을 이어왔다.

삼양사의 역사는 1919년 경성방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성방직의 설립으로 조선에는 두개의 근대적인 기업이 생겼다. 경성방직보다 2년 앞서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방직이 있었던 것이다. 경성방직은 철저한 민족기업이었다. 2만주의 발행주식 전부를 한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최대 주주는 김경중·김기중 형제였는데 김경중은 후에 경성방직을 키워 조선 최대의 갑부가 된 김연수의 부친이다.

경성방직의 주주는 김경중 형제를 비롯,구한말의 풍운아 박영효와 박용희 최준 장두현 이일우 등 당대 거부들을 포함한 1백90명이었고 초대 사장에는 박영효가 피선됐다. 김연수는 부친으로부터 들은 박영효의 영입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회사설립을 위해 정부에 허가신청을 냈을때 일본정부는 꼬투리를 잡아 통과시키지 않았다. 여러차례 신청해도 도대체 설립허가를 내줄 생각을 안해 아예 포기하려고까지 했다. 간신히 허가를 받았으나 이번에는 회사설립에 대해 일본정부가 갖가지 이유를 들어 트집을 잡았다. 이리하여 당시의 명망가였던 박영효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김연수가 경성방직에 참여한 것은 1922년 27세 때였다. 1921년 경도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한 김연수는 형인 김성수가 경영하던 경성직유를 인수해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운영하고 있었다.

상무로 경방에 취임한 김연수는 24년 근대 자본주의적인 농업경영을 위해 삼수사를 설립했다. 삼수사는 1931년 회사명을 삼양사로 바꾸고 농장과 간척사업을 벌인뒤 39년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35년 박영효가 경성방직 사장에서 물러나자 바통을 이은 김연수는 일제말 국내 최대의 갑부로 자리잡았고 일제하의 고위 관직도 지내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김연수는 1933년 일본의 기린맥주회사가 한국시장에 진출,소화기린맥주회사를 설립할 때 이 회사의 취체역으로 취임했다. 한국인 취체역에는 두산그룹의 사실상 창업자인 박승진도 있었다. 일본 기린맥주측은 당시 한국의 실력있는 기업인으로 이들 둘을 꼽았던 것이다. 박승직은 1896년 현재 종로4가 배오개에 박승직 상점을 차렸던 구한말 배오개 상인이었다. 박승직은 소화기린맥주의 취체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맥주와 인연을 맺었고 해방후에는 아들인 박두병이 이 적산회사를 불하받아 오늘날 OB맥주로 키웠다.

이들 두 기업은 해방후 혼란속에서도 왕성한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기존 기업인들보다 더 큰 꿈으로 도전하는 신출내기 기업인들도 있었다.

『공사판을 전전하다 쌀가게에 정착했다. 주인의 신용을 얻어 쌀가게의 운영권을 맡으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돈도 제법 벌었다. 이 돈으로 여러가지 사업도 했다. 46년에는 중구 초동의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했다. 이때 현대라는 상호를 처음 사용했다. 공부도 학식도 모자란 구식 사람이지만 현대를 지향해서 보다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였다. 어느날 몇백원의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몇천원을 받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동차수리업과 건설업은 격이 달랐다. 당장에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안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꿈이 있는 하루하루였다』 19세의 가출소년 정주영의 회고담이다. 그는 정치판에 뛰어든 오늘 이같은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정치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현대그룹의 실질적인 모태였다.

오늘날 50대그룹의 대열에 오른 재벌그룹중 상당수가 50년대 초반 둥우리를 틀고 있었다. 이처럼 기업인들이 큰 희망속에 꿈을 키워가고 있을 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6·25가 터졌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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