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기업인 부상 “거부얼굴 세대교체”/무역업 호황·적산불하등 기회 활용/이병철·구인회·정주영등 주역등장/새물결 적응못한 최창학·방의석등은 몰락의 길로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와 마카오무역으로 40년대 후반 재계는 큰 판도변화가 일어났다. 일제시대에 활약했던 기업인들은 크게 휘몰아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움츠린 반면 신흥기업인들이 재계의 주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일부 토지자본도 산업자본으로 전환됐다. 식민지시대를 주름잡던 기업인들은 혼미한 정치권에 깊숙이 개입하여 적산불하와 원조,무역허가 등을 얻어 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으며 정치권도 돈줄에 말려들어 이른바 정경유착이 이 땅의 기업사에 뿌리내리게 됐다.
그러나 일제가 막을 내리고 우리 정부가 모양을 갖춰가면서 이들 기존 기업인들은 거센 변화의 물결속에서 하나 둘 재계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갑부의 대열에 올라 금광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창광업의 최창학은 자유당정권이 들어선 이후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고 영보합자의 민규식,함흥택시의 방의석,대동광업의 이종만,인천의 미두시장을 석권했던 조준호 등은 6·25이후의 재계사에서는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특히 해방당시 조선 최대의 갑부였던 최창학의 몰락은 부의 무상함을 실감케 했다. 정치적인 패를 잘못쓴 그는 자유당 정부로부터 미움을 사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창학은 사실 임시정부와 김구선생을 위해 대한독립애국협성회를 조직하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했으나 임시정부에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다. 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친일인사들의 돈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이 돈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유당의 정적이된 임시정부출신 인사들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더욱이 혼란속에 인플레가 기승을 부려 최창학의 돈가치는 시시각각 떨어졌다. 사채놀이로 벌어들이는 이자보다 몇배나 빠른 속도로 최창학의 돈가치가 떨어져 결국 재계의 뒷전으로 영영 사라졌다. 최창학의 몰락은 기업인들에게 정치권과는 불가원 불가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개항이후 국내 상권을 쥐고 있던 시전상인 종로상인들도 명맥을 잇지 못했고 일제에 빌붙었던 많은 기업인들이 점차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대신 귀속재산을 불하받거나 미 군정의 도움으로 남보다 빨리 무역업 허가를 받은 기업인들은 큰 돈을 만지면서 재계의 앞자리로 부상했다.
1950년 4월 당시 재계를 선도했던 무역협회 간부진은 이활(동일기업) 김용주(대한해운공사) 김익균(건설실업) 김용성(대한물산) 김인형(동아상사) 설경동(대한산업) 전택보(천우사) 안동원(상호무역) 이종민(화신산업) 서선하(삼흥실업) 한격록(동양실업) 송대순(대신상사) 오계선(삼양사) 김의정(고려흥업) 황태문(광덕상회) 조인섭(천일무역) 조영일(대성실업) 신영균(영화물산) 김정도(중앙교역) 김정중(상신무역) 백낙승(대한문화선전사) 이연재(미진상사) 강재영(동화실업) 강익하(금학상공사) 김생훈(남창실업) 강장렬(동건무역) 주휘한(삼흥실업) 임송본(식산은행) 등이었다. 해방후 5년동안 재계의 얼굴이 크게 바뀐 것이다.
당시 재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신흥기업인들의 부상이다. 오늘날 재벌의 상좌에 자리잡은 대부분의 기업인들에게 당시의 혼란은 오히려 사업의 기초를 다지고 부의 틀을 갖추는 토양이 됐다.
현재 국내 최대의 재벌인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은 해방되던 해 대구에서 양조장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국내상황은 자본과 기술이 거의 없는데다 전력 공급마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단 기간내에 물자생산이 확대될 전망은 거의 없었다. 무역이야말로 국가의 급선무라는 판단에서 그는 본거지를 서울로 옮겨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 들었다. 본거지를 서울로 옮긴 이병철은 48년 11월 삼성물산공사를 차리고 국제무역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번창했고 새 사업을 시작한지 1년만에 무역업 랭킹 7위에 올라 당시의 대무역회사였던 천우사(전택보) 동아상사(김인형) 대한물산(김용성) 화신산업(박흥식)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1950년 2월 전택보 설경동 등 15명으로 구성된 일본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40년대 말 단기간에 대그룹으로의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도 50년 1월 현대 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현대그룹의 실질적인 모체인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럭키금성그룹의 구인회,한진그룹의 조중훈,한일그룹의 김한수,동양그룹의 이양구,한국유리의 최태섭 등도 당시 활기를 띠던 무역업과 빈약하나마 제조업에 손을 대면서 대그룹으로의 출발을 다짐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 부의 성을 쌓고 있는 많은 기업인들이 불하받은 적산을 기반으로 나름대로 웅지를 키우고 있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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