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 8천여명 희생 6·25 최대격전지/포탄바다 골짜기 다시 나무 “빽빽”/곳곳 군화조각 나와 아픔 아직도…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고개는 한국전쟁중 최대의 격전지로 손꼽힌다. 피아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곳은 조선조때 부자마을로 유명해 다부동이었으나 전쟁발발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이 이곳을 대구사수의 최후거점으로 삼아 북진의 기세를 잡았다해서 「다시」의 경상도사투리인 「다부」가 동네이름이 됐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대구에서 구안국도를 따라가다 칠곡군 동명면을 지나면 꼬불꼬불한 학명고개와 만나게 된다.
다부동 고개로 불리는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해발 8백39m의 유학산,수암산,328고지,오계산,가산,볼링 앨리(Bowling Alley) 등 일대가 다부동 전투의 피비린내 나던 무대였다.
55일간 9차례나 밀고 밀리던 혈전끝에 50년 9월24일 국군이 최종 승자가 됐을때 전사자만 우리측이 2천3백명,인민군은 5천6백90명에 달할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한국전 전사에는 당시 산과 골짜기·도로 등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선혈이 개울을 이루었다고 기록돼 있다.
다부동 전투가 시작된 것은 50년 8월4일.
6월25일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우고 쾌속으로 남하,이날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했다.
전투다운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경상도 땅까지 밀린 국군은 왜관과 다부동을 축으로 남으로는 낙동강,동쪽으로는 포항에 이르는 Y자형 최후 방어선을 치고 결사항전 태세를 갖췄다.
이에 주춤한 북한군은 「광복절 부산점령」의 목표를 수정,「8월15일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폈다.
다부동 고개전투에서 북한군은 당시 서울에 선봉 입성한 3사단과 13,15사단 등 3개 정예사단을 약목면과 가산면,인동면(현재 구미시)쪽으로 협공케 한 반면 한국군은 백선엽장군이 이끄는 1사단만이 맞섰다.
북한의 첫 공세로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자 주봉인 유학산 전투에서는 국군들이 수류탄을 너무 많이 던져 팔이 퉁퉁 부을 정도였다.
당시 특공대로 용맹을 떨친 「다부동 전우회」 부회장 이영환씨(62·중령예편)는 『전투가 계속되면서 산기슭마다 수많은 시체가 쌓여 냄새가 진동했다』며 『아직도 여기 산골짜기에는 썩은 군화조각과 인골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 군군의 사단본부이던 동명국교의 담장에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탄흔이 그때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포탄으로 온산골짜리가 풍비박산이 되고 능선마다 선혈이 낭자했던 격전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볼링핀이 쓰러질때 처럼 「따다닥」 소리를 내며 포탄이 작렬해 볼링 앨리로 불렸던 천평동에서 진목정마을까지의 4㎞ 직선도로는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됐다.
백선엽장군이 『내가 선두에서 돌격하다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쏘라』며 최선두에서 지휘해 최후의 승리를 차지했다는 진목정마을 서쪽의 무명고지도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골짜기 폭이 5m정도로 좁았던 학명고갯길도 구안국도와 연결,4차선으로 확·포장되고 있으며 유학산 밑으로는 대구춘천간 중앙고속도로공사가 한창이다. 학명고개 너머에 81년 11월30일 세워진 다부동 지구전적기념관 2층에는 당시 참전용사 2백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매년 8월23일 전적기념관에서 행사를 갖는 다부동 전우회는 생존해 있는 많은 전우들의 이름도 그곳에 새기고 싶어한다. 전쟁때 태어나 20여년간 다부동 전투를 연구해온 다부동 전우회 명예회원 신이견씨(42·대구 서도국교 교사)는 『북한은 이제 용서해줄 수 있으나 6·25전쟁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며 『젊은 세대들이 6·25를 너무 몰라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부동은 이제 「다부」 돌아갈 수도 없고,「다부」 돌아가서도 안된다.<대구=유명상기자>대구=유명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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